Lima Travel Oct 16-24


 □ WTC 2016 Conference 논문발표  ---------------------------------------1

 □ Visit Juanita at Lima            ---------------------------------------6

 □ 6.25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안했다.   --------------------------------------14

    ○ Stand Or Die  ----------------------------------------------------14

    ○ 6.25전쟁 호국영웅 --------------------------------------------------16

    ○ 귀신 잡는 해병 -----------------------------------------------------18

    ○ 우리는혈맹국 터키를 응원한다 ―---------------------------------------21

    ○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윌리엄 해밀턴 쇼와 그의 가족----------------23

     (William Hamilton Shaw‘family, who loved Korea more than a Korean)

 □ Out or Die! ---------------------------------------------------------27

     Feb 21, 2017

     Dongree wright  -------------------------- -----------------35



 

 □ WTC 2016 Conference Talking 


이번 미국 여행은 여러 가지 임무를 가지고 출발한 여행이었다. 우선 Oct 18-22 동안 Illinois Champaign에서 개최되는 Wolfram Technology Conference 2016에서 Speaker로서 논문을 발표해야 한다. 논문발표가 끝나면 바로 Ohio Lima에 들러 Juanita 여사를 만나 뵙고 인사드리고 오기로 계획을 세우고 비행기 ticketing 까지 다 해놓았다. Lima 여행이 끝나면 Dallas에 들러 재홍이 집에서 며칠 (22-27) 쉬었다가 한국에 돌아오는 일정을 잡아놓았다. 이왕에 미국에 갔으면 둘째내 집에 들러서 어떻게 미국 생활에 적응하며 살고 있는 지 둘러보고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WTC 2016에 참가하고 더욱이 이 나이에 영어도 서투른 처지에 발표까지 하는 것은 아무리해도 무리한 일이 아닌가하고 하고 모두들 걱정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2006년 10월에도 아내와 함께 이 WTC 2006 에 참석한 경험이 있다. 그 때도 논문발표하고 끝난 다음 둘째가 LA에 살 때 들러보고 온 일이 있었다. 그 때도 그렇다. 석 달 후에는 정년퇴임 하는 마당에 대단한 학문적 열정을 가진 것도 아닌데 무리해 가면서 Conference에 참가하고 논문 발표하러 미국까지 갈 필요가 있었느냐고 의아해 하는 눈치들이었다. 그런데  나는 발표 후에는 내 프로그램을 이용해 보겠다고 NASA 중력부장이 프로그램을 복사해 달라고 해서 복사해 주기도 했으며 Boston대를 졸업한 젊은 물리학자도 자기도 교수님 발표를 보고나서 물리공부를 다시 더 해야겠다는 말을 점심시간에 나눈 일이 있었다. 발표하면서 나는 Mathematica를 혼자 익혀서 학생들에게 가르쳐 주었다고 했던 것 때문에 그런 말을 한 듯싶었다.


그 당시의 발표제목이

“Mathematica Applications  for Tensor Analysis in Physics Classes” 

(http://library.wolfram.com/infocenter/Conferences/6466)


이었다. 실은 목원대에서 ’Mathematica for Physics’ 교과과정을 1999년도에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학부과정에서 신설 도입하여 강의를 했다. 물리학도들에게 물리학적 개념을 가시화해서 보여주고 또한 도래하는 지식정보화사회에서는 물리학도들에게도 소프트웨어 교육이 절실한 시대가 되기 때문에 이를 대비해서 Mathematica for Physics 강의를 통하여 수행된 결과를 발표한 것이다. 빈약한 영어실력 때문에 참석자에게 얼마나 정확하게 설명됐는지 알 수 없었지만, 물리가 본래 과학의 기본학문이며 Mathematica 프로그램도 기호와 연산으로 운용되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비록 설명이 빈약하드래도 프로그램 시연과정을 통해서 발표내용의 핵심은 대부분 이해 될 수 있었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발표내용과 함께  Mathematica 프로그램이 Wolfram library에 업로드 되어 오히려 Journal에 발표된 article 보다 편리하게 독자들이 접근하고 또 바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Conference에서 발표하는 것이 유리한 점이 많다. 마침 Conference기간의 CEO 리셉션 행사 때 나는 나의 아내와 함께 우연인지 배려인지는 모르지만, 마침 Wolfram CEO인 Wolfram Stephen 박사와 같은 테이블에 나란히 자리를 함께 하게 되어 명암도 나누고 한국과 우리대학 이야기도 나누면서 인상적인 리셉션 시간을 가졌었다. 내가 발표한 논문 중에서 Mathematica 관련논문을 수집하여 Wolfram Library Archive에 올려주며 매년 Conference에 초청메일을 보내주기 때문에 고마운 마음이 들어 Technical Conference에 한 번 더 참석해보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참 이었다. 마침 금년 초에 KISTI 대학공동 연구 과제를 수행하면서 WTC 2016에 논문을 발표하겠다고 계획서를 제출한바 있어 Abstract을 제출하고 speaker로 선정되면서 Conference 발표를 준비하게 되었다. 마침 10년 만에 논문발표차 미국에 또 여행하게 되었다. 마침 6월 23일에 고려대에서 2016년 한국 매쓰매티카 사용자대회가 열려 여기에서 “Vectorial Platform for Manipulating Polarization Mode Train Realized with Jones Vectors in  Mathematica“,  즉 Wolfram Conference에서 발표하는 내용과 똑같은 주제로 발표를 하였다. 발표된 프로그램을 평가받고 보완점을 보충하고 프로그램 시연방식에 대해서 점검하는 기회로 삼았다.

새롭게 제작된 프로그램이 발표논문의  핵심이기 때문에 프로그램 시연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Technical Conference에서 논문 발표의 관건이다. 서울 발표에서 대체적으로 무난히 발표했으며 좋은 반응을 받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발표도중에 프로그램이 중단되었었다. 마침 바로 결론으로 들어가도 되는 과정이었음으로 자연스럽게 마무리 할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수행 중에 프로그램이 중지되지 않는 범위에서 프로그램 시연이 행해지도록 하는 것이 발표를 준비하는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었다. 이전의 발표와는 다른 부담을 갖게 되었다. 이번 프로그램은 4-train platform으로서 6.73=2058 경우의 편광모드를 시뮬레이션 하는 프로그램으로서 전자파의 진행과정을 순간적인 벡터필드로 표시하는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이다. 임의의 순간 벡터필드를 표시하기 위하여 순간의 벡터요소를 벡터 계산하여 3D 그래픽으로 표시하는 가시화 프로그램이다. 2-train mode 보다 프로그램 계산용량이 8배나(2.3MB)나 더 크다. 벡터계산하고 그래픽 처리에 메모리 소모가 많기 때문에 프로그램이 정지된 것이라 판단된다. 본 프로그램은 편광모드 진행과정을 벡터필드 전파과정으로 가시화함으로서 편광파의 물리적 특성을 정확하게 표시하는 플랫폼 제작을 우선목표로 하는 프로그램구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그램의 효율성과 안정성에 대한 연구는 충분히 고려되지 못한 상태였다.  이를 위해서는 Mathematica 최신 버전에서 활용되는 parallel computing 함수를 적용하면 좀 더 효율적으로 프로그램을 수행할 수 도 있지만, 이를 이용하여 프로그램을 수정하고 확인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현재는 없음으로 프로그램을 효율적으로 운용하여 프로그램이 다운되지 않는 범위에서 시연할 수밖에 없다. 영호가 갖다 준 노트북이 Samsung NT301V5A와 LGZ36두 종류가 있는데 DVI conection과 키보드 문자체를 고려하여 무겁고 구형이지만 Samsung 노트북을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VGA 어댑터까지 구입해 놓고 Samsung notebook으로 Conference 발표하기로 하였다. 이 노트북으로 프로그램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연습을 발표직전 Oct. 20일에도 Hawthorn 호텔방에서도 연습하였었다.


   인천에서 Chicago가는 비행기를 17Oct16 17일 10:40에 baggage 1개와  bag 1개 짐 두개를 가지고 14시간 비행 후에 Chicago에 17Oct17일 09:35에 연착 없이 도착했다. 입국신고하고 짐을 찾아 다시 붙이고 구내 열차를 타고 Champaign 가는 비행기를 타는 Gate를 찾아가는데 열차를 타고 Champaign에 가는 American Eagle 3718 탑승 장에 왔다. 3:15 pm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고 Champaign 공항에 04:02분에 정확히 도착했다. 공항에 도착하여 2개의 짐을 찾고 Hawthorn Hotel에서 ride하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Wolfram Conference에 참가하는 한 여성이 내 대신 Hotel에 전화를 해 주었으며 그 여성은   Conference가 거행되는  Hilton Garden Inn으로 숙소를 정했는데 마침 호텔에서 차가 와서 그의 일행을 실어가고 나만 혼자 남아서 호텔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10여분 지난 후에 드디어 Hawthorn 호텔에서 여성이 승합차를 몰고 도착했다. 늦게 와서 미안하다고 했다. 호텔에 도착해서 기홍이 카드로 check in 하고 짐을 풀었다. 방은 바로 카운터 옆에 배정되었으며 전화도 internet 잘 되고 편리하게 되어 있었다. 10년 전에 투숙했던 바로 그 호텔이었다. 그런데 그 때는 이 호텔에서 Conference를 진행했었는데 이번에는 건너편 Hilton 호텔에서 진행된다. 17일에는 일단 짐을 풀고 재홍이와 통화도 하고 Stephen에도 메일을 보냈다. 핸드폰은 받기는 했지만 내가 연락하는데 는 잘 안되었다. 조작할 줄 몰라서 불편했지만 우선 미국 내 전화는 호텔 전화를 사용할 수 있으니 당분간 이를 이용하면 되었다.


18일 아침은 Hawthorn Hotel에서 아침을 먹고  Hilton Garden Inn에 가서 등록을 하고 행사장을 들러보았다. 준비실에 발표할 Samsung 노트북과 커넥터를 가지고 이 노트북으로 발표를 하는데 문제없는지 점검을 받았다. 자기네들 커넥터로 바로 LCD 모니터에 연결해 보더니 no problem! 이라고 한다. 내가 직접 노트북에서 프로그램을 수행해보고 점검해 보았더니 잘 작동이 되었다. 만일 문제가 있으면 자기한테 바로 연락하라면서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촬영실에 들어가 인터뷰도 하였다. 일단 안심을 하고 프로그램 수행을 호텔에 돌아와서 또다시 실행해 보면서 20일 9:00 am 첫 번째 발표에 지장이 없도록 만반의 준비태세로 임하였다. 오후 3시에 Wolfram 박사의 강연을 듣고 저녁도 함께 먹었다. 19일에는 내가 발표할 세션 장에서 다른 사람의 발표를 들었다.


드디어 20일 9:00 발표 날이 되었다. 그러나 발표 전에 노트북을 한 번 세팅하고 연습해 볼 심산으로 아침 일찍 식사를 하고 내가 발표할 Spartan/Golden Gopher 세션 장에 노트북을 지참하고 들어가 보니 이미 8:30 발표자가 노트북을 세팅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9월 14일 프린트 해놓은 schedule에는 내 앞에 발표자가 없었으며 내가 9:00am 첫 번째 발표자로 되어있는데 Wolfram member들의 발표 일정들을 아침 일찍 추가 배정해 놓은 상태였다. 지금 셋업해 놓은 발표자도 Wolfram사의 Hsien-Ching Kao 로서 “ What’s New in Probability & Statistics”의 Title로 발표할 예정이었다. 이미 set up 해 놓은 상태인데 내거 한번 set up해 보겠다고 말 할 수가  없었다. 일단 Kao 발표가 끝나고 진행자에게 내 노트북을 셋업해 달라고 노트북을 주었다. 관리자가 커넥터를 전부 연결해도 스크린에 화면이 올라오지 않는다. 다른 단자들을 점검해 보아도 안 되고 준비실 기사가 두 사람이나 와서 시도해 보아도 안 되니 자기들 노트북에 내가 가져온 USB를 삽입하여 간신히 발표문이 스크린에 뜨게 되자 내가 발표를 시작하게 되었다. 먼저 발표가 지연되어서 미안하다고 말문을 열었다. 본래 발표시간 20분 질문시간 5분 이동시간 5분이었는데 화면을 띄우는데 시간이 8분 정도나 까먹으니까 계획대로 발표를 할 수 가없게 되었다. 이론적 설명을 끝내고 프로그램을 수행하려는데 frame만 나타나고 벡터필드는 움직이지 않는다. 내 노트북이 아니고 다른 노트북이라 프로그램 초기화가 안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프로그램을 시동하면 시간이 좀 걸리는 프로그램이다. 진행자는 그만 끝내라는 제스추어를 보내온다. 다음 발표를 위해 참석자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는 것이 시선에 들어오고 있다. 결국 이 프로그램은 내 사이트에 있으니 이 password로 다운로드해서 여러분이 직접 프로그램을 수행해 보라고 하면서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발표를 끝냈다. 다음 발표자를 위해 자리를 내 주어야 한다. 영 기분이 안 나는 발표를 하고 말았다.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논문발표를 했어도 이번과 같은 일은 처음이었다. 전염이 되었는지 다음 발표자가 발표하려고 세팅을 해도 또한 화면이 안 뜨니까 이 발표자(Wolfram사 연구원)는 태연스럽게 화면 없이 구두로만 발표를 했다. 관리자들이 서둘러서 이번에는 2, 3분 후에 화면이 작동되어 정상적으로 발표를 하는 것을 앞에 앉아서 보게 되었다. 마침 일리노이대학에 재학 중인 조현진양(KISTI 조기현 박사 여식)이 발표장에 참석했다가 이 광경을 보게 되었다. 진행자가 이야기하는데 섭섭하면 점심때 다시 할 수 있다고 한다고 나한테 귀띔해주고 오후에 시험이 있어서 일찍 가봐야 한다고 하면서 인사하고 나갔다. 쉬는 시간에 나도 짐을 챙겨 나오고 말았다. 


마침 한국에서 6월 달 Mathematica user conference에 참석했던 포스텍의 이재민 박사가 쉬는 시간에 인사를 하지 않는가? 방금 내 세션에 참석해서 광경을 다 보고 나온 것이다. 상심된 내 기분을 달려주려는 심산으로 자기가 차를 렌트해 갖고 왔으니 밖에 나가 기분 전환으로 한국음식이나 먹으로 가자고 해서 따라 나오고 말았다. 완전하게 발표한 것은 아니지만 일단 이름을 올렸으니 점심때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고 진행자가 직접 아무 말도 없으니 일단 끝난 것으로 작정해 버리고 내일 Lima 여행이나 준비해야겠다고 마을을 돌려버렸다. 이렇게나마 발표하고 발표자목록에 올린것만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았다. 이왕에 시내에 나왔으니 일리노이스 대학이나 한번 돌아보고 나오자고 해서 캠퍼스를 한 바퀴 돌고 한식당 Biwon에 가서 순두부를 먹고 나니 기분전환이 되었다. 오후에는 세션 장에 들어가지도 않고 Dr. Lee와 휴게실에서 자유스러운 시간을 갖었다. Dr. Lee도 프로그램이 문제가 아니라 내 노트북이 문제의 발단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고 했다. 물론 그렇다. 우선 OS가 Windows인데 방금 전에 Mac으로 세팅한 것을 바로 연결한 것이었는데 안 되니까 세팅을 바꾸는 과정에서 에러가 발생한 듯하다. 왜냐하면 18일 검사실에서는 이 노트북을 사용할 수 있다고 확인해 주었는데 현장에서는 안 되었다. 21일 날 아침 Dr. Lee의 맥 노트북으로 그 장소에서 연결할 때는 바로 스크린에 표시되었으며 우리는 스냅을 몇 장 했었다. 저녁때에도 우리는 또 Biwon에 가서 한식을 시켜 먹으면서 Champaign에서 회포를 푸는 시간을 가졌었다.


어제는 기분이 안 나서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오늘 막상 나 혼자서 Champaign을 떠나려 하니 스냅 한 장도 없이 떠나기가 아쉬워 스냅이나 몇 장 하려는 심산으로 Dr. Lee에게 전화해서 일찍 나오라고 해서 같이 아침을 같이 먹자고 했더니 마침 Dr. Lee가 맥 노트북을 들고 와서 아침을 같이 먹었다. 같은 식탁에서 아침식사를 같이 한 참가자가 어제 내 세션에 참석했는지 polarization에 대한 질문을 해왔는데 나는 일직 발표장에 가 보아야 할 계획이었음으로 시간이 없어서 답변을 못해드려 미안하다고 하면서 자리를 뜨게 되어 지금도 마음이 걸린다. Dr. Lee와 함께 아침식사를 마치고 어제 발표장에 가보았더니 마침 전날에 인사를 나누었던 Jun Yasui 일본인 교수가 나와 있어 기사 실에 연락해서 스크린을 좀 띄워주게해서 셋이서 snap을 몇장 하게 되었다. Conference는 21일 까지 진행되고 리셉션 행사도 있지만 나는 Lima 여행을 위해 짐을 꾸리고 나서 check out을 하고 Champaign 공항까지 ride 해달라고 부탁을 해서 10:5분에 Hawthorn  hotel을 출발하여 공항에 도착했다.  

  



묶음 개체입니다.

Fig.1. Dr. Lee and Prof. Yasui at the WTC Oct 21, 2016 at Champaign. 


Wolfram에서는 Conference에서 발표된 Presentation과 Watch Video를 Wolfram web site 에 Dec 20 업로드 되었다고 메일이 왔다. 비록 발표장에서 내가 미처 보여주지 못한 polarization platform을 독자들이 직접 다운받아 수행해 볼 수 있도록 upload되었다니 다행이었다. 실제로 사이트(http://www.wolfram.com/events/technology-conference/2016/presentations/#thursday  ) THURS, OCTOBER 20에서 내 프로그램과 Video를 다운해서 수행해보니 마침 내가 제출해준 프로그램이 정확하게 upload되어 있었으며 잘 수행되었다. 일단 안도감이 들었다. 나는 발표장에서 제시해준 password로 내 사이트에서 다운받아 수행할 수 있도록 Guideline을 첨부해서 Ver.8의 jdpmp4tv8.nb 프로그램을 내 사이트(http://home.mokwon.ac.kr/~heejy/program.htm 에  Dec. 19, 2016 upload 했었다. 실제적으로 10.3.0  이상의 버전에서는 Enable Dynamic 이 Platform을 수행해 주기 때문에 문제점은 없었다. 그러나 dual core로 parallel computing하면 수행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는 방법이 가능할 것임으로 이를 이용해서 프로그램을 보완하는 문제는 숙제로 남아있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wtc2016video1726.png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1280pixel, 세로 1006pixel

 Figure 2. Article presentation at the WTC2016 Wolfram Technical Conference on Oct 21, 2016 at Champaign.  


□ Lima의 Juanita를 방문하다 !  

     

본래는 이번 여행은 댈러스에 사는 재홍이네 식구도  만날 겸 아내와 함께 미국여행을 가기로 계획을 세우고 기홍이가 비행기 스케줄도 짜고 이왕에 미국에 갔으니까 기분전환으로 캐나다 쪽으로 여행도 한번 해보는 계획까지 잡아놓았다. 이제까지 살아가면서 관광여행 한번 가본 일이 없음으로 죽기 전에 이번에 여행한번 가보자고 해서 비행기 티켓도 다 구입해 놓았었다. 그런데 아내 건강상태가 장시간 비행기를 타고 여행자와 함께 행동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고 병원 의사가 이번 여행은 무리라는 판단을 내리게 됨으로 아내의 비행티겠을 반환하고 여행일정도 업무수행목적만을 위하는 스케줄로 축소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WTC 컨퍼런스에 참가하여 논문발표를 하고 나면 바로 Lima에 가서 Juanita를 방문하고 다시 댈러스에 와서 재홍이내 집에서 며칠 쉬었다가 귀국하는 스케줄로 짷여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8일 동안에 미국 내에서  네 개의 적은 도시를 왔다 갔다 해야 하는 스케줄이 빡빡하게 짷여지게 되었다. 이는 Lima에 있는 Stephen Shaw가 안내해 주는 스케줄을 따라 짷여지게 되었다. 이미 Stephen 판사와 연락해서 어머님 건강상태가 어떠하며 부인 Corte가 주말에는 집에 있게 되는 주말을 활용하는 여행계획이 되었다.


   옆에 동행자가 있으면 도움이 되지만 나 혼자서 오랜만에 여행하게 되기 때문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형편이다. 비행기를 짧은 시간에 여러 번 갈아 타야하며 시차개념이 없는 형편에 비행기를 타고 내리는 도시바다 표준시간이 달라진다. Oct 17일 인천에서 Chicago에 도착해서 짐을 찾아 다시 부치고 CMI Champaign 가는 비행기 03:15 PM를 타야 하는데 내 시계를 보니 3:30분이 지났다. 당황해서 두리번거리다가 공항 시간을 확인해 보니 오후 1시간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나는 Champaign 호텔에서는 자명종 시계와 핸드폰 시간만 Chicago 시각에 맞추어 사용하다가 Lima에서 Dallas로 왔다가 귀국했다.


Oct 21 아침 10:5 분에 호텔에서 ORD Champaign 공항에 나를 차로 데려다 주었다. 이제  Lima 여행이 시작되었다. Baggage 2개를 붙이는데 신용카드나 첵크카드로는 안 되고 현금으로 60$를 지불했다. Chicago에서 짐을 바로 Wayne로 옮겨 싣는 가격인지 여하튼 짐을 부치고 안전심사를 하고 01:25 PM에 비행기에 탑승하니 마침 창문옆자리이었다. 날씨가 화창하고 Champaign에서 Chicago 가는 한 시간 동안 광활한 일리노이스 평야와 도시들을 핸드폰 카메라로 스냅하면서 왔다. 이제 오후 04:50 pm FWA Fort Wayne 에 가는 American Eagle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비행기가 고장 나서 45분 출발시간이 연장되고 또 다른 비행기로 가야한다. 비행기가 지연되었다고 Stephen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결국 비행기는 한 시간 지연되어 7:30 PM에 도착했다. 안전수속을 마치고 baggage room에 도착하니 Stephen이 알아보고 손짓을 하였다, 우리는 반가움에 서로 부둥켜 않고 5년 만에 재회의 감회를 나누었다. Stephen은 나를 도와 짐을 찾아 나를 차에 실고 Lima를 향해 달리었다. 짐을 찾아 공항을 출발할 때는 밤 8시가 넘었다.


한 시간 정도 차를 달려 Lima의 법원거리에 도착하였다. 어느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부인 Corte와  Loush 부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5년 만에 미국에서 다시 만나게 되니 모두들 부둥켜 않고 형제와 같은 감정이 들어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어른 거렸다. 마침 Loush도 올 여름 어머니를 여의었기 때문에 우리 세 가족은 연로한 어머님을 모시게 되는 자식들로서의 고충을 짐작하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다 같이 자신의 이야기로 생각하고 있었다. 와인으로 서로의 만남을 환영하고 저녁식사를 나누면서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마침 지난여름 어머님이 운명하시던 날 밤 용케도 어머님이 요양하시고 계시는 나사로 요양원에서 머물면서 영민의 순간을 지켜볼 수 있었던 이야기도 하게 되었다. 레스토랑이 문 닫을 시간이 가까워 져서 우리는 일어나게 되었다. Loush 부부와는 작별하고 스티븐이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Wingate 호텔로 나를 대려다 주었다. 스티븐 부부가 방에까지 들어왔다. 내일 일정이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니까 이왕에 방에 들어왔기 때문에 준비한 선물과 봉투를 전해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가방속 깊숙이 넣어준 봉투와 CD를 꺼내고 엊그제 WTC 행사장에서 산 여자용 셔스를 Stephen에게 건네주었다.


 9월 21일 평화공원에서 추모식 행사가 끝난 뒤 김낙환 목사님 방에 들렀을 때 미국에 가서 논문발표하고 난 후에 주아니타 여사님께 인사드리고 오겠다고 내가 얘기 하니까 김 목사님은 여비에 보태라고 하면서 봉투를 나에게 주셨다. 또 그 이야기를 김 목사님이 전석범 목사님 한테 이야기 하는 바람에 전석범 목사님도 여비와 함께 쓰라고 봉투를 주었는데 주아니타 여사를 돌보는 아드님한테 드리는 것이 낳겠다 싶어 우리 가족도 보태서 US$800 준비하고 이름도 써넣고해서 봉투를 만들었다. 그리고 섭섭하여 내가 어제 WCT행사장에 구입한 여자용 셔스 세벌을 준비해서 가져왔는데 이는 세 여자들, 주아니타, Corte, Losch 부인 것으로 사왔다고 했다. 또 9월 21일 서울 평화공원에서 행사한 것을 최종식 회장이 나한테 보내준 행사사진 CD를 차라리 쇼 가족에게 주고 오는 것이 낫겠다고 해서 그 CD도 함께 건네주었다. 스티븐은 다른 선물은 다 받겠지만 돈은 안 받는다고 완강하게 거절하였다. 그래서 이것은 한국의 친구들이 전해주고 오라고 했으니 내가 도로 가져갈 수 없다고 말하면서 품에 넣어주고 말았다. 그럭 저럭하다보니 늦은 밤이 되었다. 스티븐 부부가 떠나면서 내일 아침 9:00시에 나를 데리러 온다고 하면서 호텔을 떠났다. 결국 Lima에 도착하게 되었으며 스티븐  부부와 러쉬 부부를 만나고 내일은 스티븐이 어머니한테 데려다 준다고 하고 갔으니 일단 안도의 마음이 들었다. 모처럼 목욕을 하고 잠을 청했다.   

                                                              Oct 21, 2016, Lima


아침에 일어나서 창문을 열어보니 신선한 햇살이 눈부신 청명한 아침이었다. 나는 404호실이라 창문을 열어보니 길 건너 건물이 아침햇살을 받고 선명하게 빛났다. 그 건물이 무슨 건물인지 모르지만 내가 투숙한 Wingate 호텔은 Lima의 중심가에 위치하고 있으며 가장 값비싼 호텔인 것으로 알려졌다. Lima city는 미국 Ohio 주  Allen Country의 군청소재지 도시이다. Stephen Shaw의 지방법원이 있는 행정도시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현관에 쪽지가 있어 주어봤더니 청구서가 놓여있는데 $145 정도된 것 같다. 저녁에 재홍이와 전화한 것 밖에 없었는데 어제 아침에 떠나온 Champaign의 Hawthorn 호텔에서는 4일간 머무는데 $452.46 인 것에 비하면 조금 비싼 생각이 들었다. 짐을 챙겨놓고 기다리는데 스티븐 판사는 9시 정각에 올라와서 나가자고 한다. 첵크아웃도 스스로 하는 데 나는 보고만 있었다. 원칙으로는 내가 첵크아웃을 하고 기다리고 있었어야 했지 않느냐는 생각을 나중에 하게 되었다. 낮선 도시에 처음 온 입장이라 사리판단이 안 되는 상황이라 좀 뻔뻔스러운 결과가 되어버렷다. 스티븐은 나를 데리고 바로 길 건너 있는 자기가 근무하는 Lima 법정을 한번 둘러보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차에 오르기 전에 이 근방에 꽃집이 있으면 안내해 줄 수 있느냐고 했다. 왜 그러냐고 해서 어머님이 건강이 안 좋은 상태이니 꽃이라도 드리면 기분전환이 될 것 같아서 좀 사가지고 갈려고 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스티븐은 그렇다면  Corte한테 연락하면 된다고 했다. Corte가 잘 아는 꽃집에 연락해 놓으면 된다고 하고 Corte한테 전화를 하여 부탁을 하는 것 같다.

바로 우리는 법원으로 가서 스티븐 판사 집무실로 올라갔다. 집무실은 어느 사무실과 다름이 없었다. 작년에 보훈처에서 보내진 W. Hamilton Shaw 전쟁영웅 사진액자와 1900년대의 서울 거리의 사진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또 보훈처 행사 때 중 고등학생 상대로 전쟁영웅 글짓기를 영어로 실시했는데 학생들이 Shaw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들이 담겨진 상자도 보여주었다. 나도 학생들이 어떻게 썼는지 궁금해서 한 번 살펴보고 스냅도 했다. 어떤 학생들이 참가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봉투에 적힌 이름들을 살펴보니 부산시내 중고등학생들이 쓴 글 들이었다. 부산 덕문여고 김혜민, 해연중 장지혜, 덕문여고 신효정, 부산서중 임경태 등의 이름들이었다. 한번 살펴보기 위해서 임경태 군의 글을 하나 스냅 했다. 주최 측으로부터 W. H. Shaw에 대한 이야기를 설명 듣고 나서 느낌을 나름대로 영문으로 쓴 것들이었다. 중학교 3학년생인 임경태군은


 ‘In fact, I didn’t have any interest in the history of Korea. However, I was motivated to be more interested in our history thanks to your story.‘

와 같이 쓰고 있었다. 지금은 학교에서 국사를 어떻게 가르치는지 모르지만 임 군은 국사에 대해서 평소 흥미를 갖지 않는다고 솔직하게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생각으로는 국사는 국민된 도리로 배우는 것이지 취미로 배우는 것이 아닐진데 임 군이 이렇게 쓴 것을 보니 요즈음 국사교육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우리가 학교 다닐 때와는 상당한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집무실을 나와 법정과 소속 판사들의 집무실과 자료실들을 두루 살펴보게 하였다. 법정에서는  Judge Shaw 대리석 명패가 큼직막하게 새겨져 있는 것을 내가 스냅 하니까 스티븐 판사가 옆에와 포즈를 취해 주었다. 밖에 나와서  법원건물을 스냅할때도 포즈를 취해주었다. 마침 토요일 휴일이라 자유스럽게 법원구경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사실 평생 동안 법정에 들어가 본 일이 없었는데 다른 나라의 법정을 자세히 돌아보는 경험을 했다. 법원에서 나와 Juanita가 있는 Cridersville에 가기 위해 차를 타고 Lima 거리를 지나고 마을을 지나면서 스티븐이 Losch가 근무하는 회사를 지나기도 하면서 아름다운 Lima의 전원풍경을 스냅하면서 지나왔다. 어떤 화원 집에 들러 Corte가 주문해 놓은 꽃병을 찾아가기로 했다.  여러 가지 꽃을 꽃병에 화려하게 꾸민 화병을 꽃집 주인여인이 내 놓는다. 스티븐 판사가 꽃값을 지불하려고 하기에 이는 반드시 내 이름으로 어머니한테 꼭 드리고 싶다고 우기면서 내가 미리 준비한 지폐로 지불했다. 이 꽃병을 다시 앞자리에 싣고 다시 출발해 음식점에 들러 점심을 일단해결하고 나서 Cridersville로 다시 출발했다.


  다시 차를 몰고 Cridersville에 가면서 스티븐은 자기 고향마을이라 여기는 어디고 여기는 어디라고 설명하면서 Corte가 근무하는 유치원도 지나고 드디어 Cridersville에 있는 Otterbein 단지에 도착했다. 단지에 들어서면서 간판을 보니 ‘Senior Lifestyle Choice’라고 쓰여 있다. 밑에는 ‘United Methodist Related’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아 조금 전에 Unites Methodist Church 건물을 지나온 것으로 보아 이 요양단지도 교회에서 후원하는 기관임을 짐작 할 수 있다. 내가 직접 꽃병을 않고 현관에 들어서니 주아니타 여자는 휠체어에 앉고 Corte와 함께 현관에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방으로 들어가서 꽃을 내려놓고 나는 여사의 건강한 모습을 보니 참으로 기쁘다고 말 했다.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장땡이다라는 생각이 얼른 들었다. 서투른 영어실력 때문에도 더욱 그렇다. 문득 설날에 손자들이 나한테 세배했던 생각이 나서 주아니타에게 의자에 앉으라고 하고 나는 신발을 벗고 카펫 바닥에서 주아니타한테 큰 절을 올렸다. 주아니타와 스티븐도 한국에서 절하는 모습을 보았을 것임으로 내가 큰 절을 올리려는 것을 말리지는 안했다. 자식들이 먼데 갔다 돌아오거나 어른들에게 인사할 때는 큰 절하는 것이 우리의 예법 아닌가? 주아니타도 앉아 절을 받았다. 절을 하고나니 나도 마음이 한결 가벼운 느낌이 들었다. 이 나이에 누구한테 큰 절을 올릴 기회가 얼마나 또 있겠는가? 언제 내가 또 Lima에 올수 있으며 주아니타 여사도 얼마나 더 오래 살아계실지 모르는 형편 아닌가?  年旣耆艾 雖欲悌 誰爲悌(연기기애 수욕제 수위제) ‘이미 나이가 들어 머리가 하얗게 되었는데 누구를 공경하겠는가’ 안 했던가? 君子 思其不可復者 而先施焉(군자사기불가복자 이선시언) ‘군자는 반복해서 할 수 없는일을 먼저 해라 !’  안했던가?  어려운 여행 끝에 나 혼자일망정 이곳까지 왔으니 큰 절이라도 올리고 가는 것이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아니타는 재홍이도 잘 있느냐고도 물었다. 스티븐은 9월 21일 평화공원 추모행사 사진을 복사해서 어머니한테 설명하면서 우리말로 ‘김 목사’를 뭐라고 발음해야하는지 물어봐서 내가 “김 목사”라고 큰 소리로 발음해 주기도 했다. 또 어제 컨퍼런스에 찼던 명패를 나보고 다시 한 번 차보라고 해서 내가 다시 차고 주아니타 앞에서 스냅도 하였다. 주아니타는 1960년대 서울외국인 학교 교사로 봉사하고 이대 사회학과 교수로도 봉사했던 것을 회상하면서 주아니타가 큰 아들 빌과 스티븐이 자전거로 연대캠퍼스를 타고 다녔던 이야기도 하였다. 주아니타의 발음을 내가 잘 알아듣지 못 하는 듯하면 스티븐이 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보충설명을 했다. 나도 연대 연희관 캠퍼스를 8년이나 들락날락했으니 그 이야기는 대충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랬더니 Corte가 나보고 영어를 잘 한다고 해서 한 바탕 모두들 웃어버렸다. Corte가 나를 치켜세우려는 뜻을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 셋은 동시에 웃고 말았다. 그러면서 Corte는 방에서 짐 꾸러기를 펼쳐 보이면서 우리 집사람이 함께 오지 못했으니 아내에게 전해달라는 핸드백이며 나무로 만든 성경파넬이며 주아니타 고향 등대 목판과 도서 2권 등을 싸놓았다가 펼쳐 보이면서 이걸 가져가야한다고 설명해주엇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한 시간여 정도 흘렀다. 주아니타 여사도 너무 피곤하면 안 되고 나는 04:05 PM 출발하는 FAT Fort Wayne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야한다. 공항까지 가는데 에는 한 시간여 가야하기 때문에 이제 인사를 하고 떠나야 할 시간이 된 것 같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juanitaoct2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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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은 날짜: 2017년 02월 08일 오후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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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3. Juanita R. Shaw at Otterbein on 3:00 pm Oct 22, 2016 at Lima. This is the last feature of her with me.


스티븐이 시계를 보더니 서둘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현관에 나와 주아니타 여사와 함께 스냅을 하고 다음에 또 방문해서 인사드리러 올 때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시라고 인사를 하고 Otterbein 단지를 떠나 공항을 향해 스티븐이 차를 몰았다.


Ohio Lima를 출발하여 인디아나 주의 Fort Wayne로 오면서 이야기를 나누며 공항에 도착했다. 도착해서 스티븐은 자기 형님 젊었을 때의 음악콩굴에서 연주한 것이라면서 CD를 또 챙겨 나한테 건네주었다. 스티븐 차 넘버가 PT-518이라 내가 기념으로 차 넘버를 스냅 하였다. 스티븐이 포즈를 취해 주었다. PT-518은 W. H. Shaw가 1944-46년 해군에 복무하면서 북유럽해협에서 조함했던 소함정 이름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일부러 차 번호를 그렇게 부여받은 모양이다. 다른 사람은 건성으로 볼 수 있지만 내 눈에는 금방 그 차넘버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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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4. Stephen R. Shaw by the his car with car numer of PT-518.


Chicago에서와는 달리 스티븐이 인도하는 데로 짐을 붙이고 보안검사를 하게 되어 한결 수월하게 탑승수속을 마치고 탑승 30분전에 탑승 장에 입장할 수 있었다. 스티븐은  입장티켔을 사서 탑승 장까지 들어와서 내가 탑승할 때 까지 함께 있어 주었다. 기다리면서 재홍이한테 전화를 걸어 아버지가 Lima에서 일을 다 보고 공황에 나와 있다고 알려주는 모양이다. 탑승이 시작되어 우리는 작별인사를 해야 했다. 헤어지면서 나를 두 번이나 포옹하면서 못내 섭섭함을 달레 엇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어른거렸다.

   이국 땅 낫선 곳이었지만 우리는 한 형제와 같은 느낌을 가졌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서로의 우정을 실감하고 감격스런 만남을 체험하게 되었다. 차를 몰고 오면서도 우리는 한 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동하였다. 사실 스티븐이 이야기 하는 것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 하면서도 쉴 새 없이 이야기 하고 질문하고 답변하면서 이틀 동안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이번 기회 아니면 할 수 없는 어려운 질문도 내가 했다. 자녀가 왜 없느냐?  또한 묘지를 지날 때는 만일 주아니타가 돌아가시게 되면 양화진에 모실계획이 있느냐? 등도 물어보았다. 우리는 자식을 갖지 못했다는 말을 들으니 마음이 아팠으며 괜히 질문했구나! 후회가 되었다. 아직 어머니의 뜻을 확실히 모르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어느새 10여 년 동안 서신을 교환하면서 또한 한국과 미국을 방문하면서 서로의 가족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되었다. 그러나 스티븐 자녀이야기는 한 번도 이야기 하는 것을 못 들었기 때문에 물어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양화진에는 이미 주아니타의 자리가 예약되어 있기 때문에 나로서는 물어보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마침 재홍이와 스티븐 사이에 연락이 되고 금년 초에 우리 어머님이 별세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스티븐에게 알리게 되고 Losch 어머니도 8월 달에 돌아가시고 스티븐도 어머님을 좀 더 옆에서 돌보기 위해서 작년에 Lakeside에서 Lima에 데려오게 된 내력을 알 고 있기 때문에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아픈 상처를 건드리게 된 결과가 되어버렸다.                                    

-------------- Oct 22, 2016, Lima


Lima를 방문하는 동안 날씨가 참으로 화창하고 온화하여 편안한 가운데 여행을 할 수 있었으며 가을 단풍에 물들은  Lima의 풍경은 그림같이 아름다웠으며 무엇보다도 주아니타가 건강한 모습으로 나를 맞이하고 대해준대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으며 이번 여행에는 우리 주님께서 돌보아 주고 계시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Lima에서 Chicago로 돌아오는 America Eagle 좌석이 또 창문 옆이라 광활한 오하이오 들판과 구름과 오대호에 저무는 황혼과 구름 밑에 까려있는 마을들을 스냅하면서 한 시간 여만에  Chicago에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다가 Dallas에 가는 American Airline 2349편으로 07:54PM에 도착했다. 창문너머로 보이는 광경은 해가 저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baggage room에 들어오니 재홍이 내외가 손녀들과 함께 온 식구들이 다 나와 있어 안도의 숨을 내쉬게 되었다. 재니는 몇 년 전에 애비와 함께 다녀간 일이 있으나 혜진 이와 형지는 10년 만에 보는 것이다. 객지에서 내 혈육을 만나게 보니 반가울 수밖에 없다. 공항에서 재홍이내 집까지 가는데도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무사히 공무를 마치고 자식 집에 돌아오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모처럼 가족과 함께 식탁에 함께 식사를 하고 편안한 밤을 맞을 수 있었다. 내가 온다고 재홍이는 임시휴가를 냈다고 하면서 다음 날에는 시장에 돌면서 집 수리도구을 구매하는 데 나도 동행하면서 형지가 다니는 중학교와 재니 가 다니는 학교 옆을 지나면서 돌아왔다.                                                       Oct 23, 2016 Dallas


재홍이내 집에서 토요일 밤을 새우고 다음날 아침은 마침 주일이었다. 식구들이 모두 식탁에 앉아 타국에서 잘 이겨내며 자손들도 잘 자랄 수 있도록 기도를 올렸다. 이 식구들이 타국에서 교회에 나갈 수 있도록 지도해야 될 것 같다. 오스틴으로 이사하게 되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일러야 될 것 같았다. 회사를 옮긴지 얼마 되지 않고 식구와 떨어져서 생활하는데 모처럼 애비가 왔으니 신경을 많이 쓸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재홍이가 월요일 24일 하루는 회사에 안가도록 휴가를 얻은 모양이었다. 아들 집에서 이틀 쉬었으면 귀국해서 할 일도 있음으로 귀국해도 괜찮은 형편이다. 그런데 출국은 26Oct16 12:10PM  KE0032로 되어있다.  Korean Air에 연락해보니 같은 비행기 편으로 출발일자를 이틀 앞당겨 24일 출발할 수 있었다. 귀국하기 위해 짐을 챙기면서 어제 Corte가 싸준 보따리를 챙기면서 목판에 패널을  펴 보았더니

         A man’s mind planes his way, but the Lord directs his steps.

                  Proverbs 16:9  Yun/Shaw 10.22.16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provervs169.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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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은 날짜: 2017년 02월 08일 오후 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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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5. Yun/Shaw panel of Proverbs 16:9.


의 성경귀절이 새겨진 목판판넬이었다. 이는 작년 7월 정부의 초청을 받고 어머님 건강과 메르츠 사태 때문에 한국 방문 초청에 고민하고 있을 때 취소해도 된다고 하면서 내가 적어 보낸 성경구절이 마음에 닿았는지 이를 패널로 만들어서 나에게 준 것이었다. 너무 고맙고 감동을 받았다. 나도 이번 Lima 여행은 나 혼자 벅찬 여행이었으며 Juanita건강상태도 불안정한 상태이며 나 또한 건강한 편도 아닌데 용케도 날씨도 청명하고 스케줄도 정확하게 여행을 마칠 수 있게 한 것을 보면 주님께서 발걸음을 인도해 준 것이란 믿음이 가는 대목이었다. 하여간 선물이 너무 고맙고 의미가 깊은 선물을 받았다고 답장을 해 주었다. 나는 24일 KE 032편 24Oct 16 12:10 Dallas를 출발해서 14시간 비행하여 25일 17:00pm에 인천에 도착하였다. 공항버스를 타고 대전에 밤늦게 도착하였다. 막내가 터미널에서 차를 갖고 기다리고 있다가 집까지 편안하게 데려다 주었다. 혼자서 어려운 여행을 마치고 무사히 집에 도착한 것이다. 재홍이가 스티븐한테 연락을 했는지 무사히 잘 도착했느냐고 메일이 와 있었다. 집에서 좀 푹 쉬라고 했다. 나도 무사히 잘 도착했으며 덕택에 Lima여행을 잘 마치고 올 수 있었으며 정성어린 선물에 감사하다고 답장을 보냈다. 특히 어려운 이번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올수 있게 해 주신 주님께 감사드렸다.


---------- Oct 28,2016, Daejeon


*** 그런데 나는 이글을 정리하는 도중에 주아니타 여사가 Feb.2, 2017 새벽에 소천 하셨다는 스티븐 판사로부터 소식을 받았다. 주아니타가 운명하는 시간에 스티븐도 오직 혼자였으며 시간도 새벽 같은 시간이었다고 했다. 이 소식을 듣고 나는 만감이 교차했다. 주님께서 나의 발걸음을 재촉하여 Lima에 꼭 다녀오게 하신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평생 인고의 생애를 살아오신 주아니타 여사님이 하늘나라에서는 주님의 품안에서 영원한 평안과 안식을 누리시도록 우리 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부디 하늘나라에서 평안하시기를 기도했다. ***



      

□ 6.25전쟁은 끝나지 안했다.  


○ Stand Or Die 


중국은 1911년 10월 10일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나라를 무너트리고 1912년에는 아시아 최초의 공화제 국가로 중화민국(中華民国)이 탄생된다. 하지만 각지의 군벌에 의한 내전과 몽골, 티베트의 독립 운동 등으로 중화민국은 분열되었다. 결국 1930년대에는 국공 내전과 중일 전쟁이 발발하여 중국 각지가 전쟁터가 되어버렸다. 중일 전쟁 중에 세력을 늘려온 중국 공산당이 1945년의 일본 패배 이후 국공 내전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세웠다. 내전에서 패한 중국 국민당의 총통 장제스 정권은 타이완 섬으로 쫓겨나고 만다. 소련의 지원을 받은 중국공산당이 장제스 정부를 몰아내고 중국통일을 이루는 것을 본 북한의 김일성은 우리도 조선을 적화통일 할 수 있게 후원해 달라고 스탈린에게 48번이나 간청했으나 1945년 8월 15일 미국과 약속한 것이 있기 때문에 승낙할 수 없으니 국지전으로 남한을 붕괴시키는 전략으로 나가라고 한다. 그런데 1950년 1월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이 한반도와 타이완을 미국의 태평양 극동 방위선 애치슨라인에서 제외한다는 ‘애치슨 선언’을 하게 된다. 이를 본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다시 간청하여 한반도 적화통일을 이룰 수 있는 적기라고 하면서 스탈린에게 다시 간청하게 된다. 스탈린도 한국내 전쟁에는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김일성의 간청을 수락한다. 따라서 최신전차와 전투기를 지원해 주기로 약속한다.


스탈린의 지원을 약속받은 김일성은 드디어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를 기해 소련제 T-34/85 탱크 252대 야크 전투기와 IL폭격기 200대를 앞세워 대한민국 전 방위 전선을 넘어 노도와 같이 기습 남침을 개시한다. 불의의 침략을 당한 대한민국은 수적으로도 열세인데다가 장비도 빈약하여 제대로 저항도 못한 체 북한 공산군은 오전 9시에는 개성방어선을 격파하고 오전에 동두천과 포천을 함락시켰다. 26일에는 의정부를  28일 새벽에는 서울 시내에 북괴군이 들어온다. 다급해진 대한민국은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해 오전 2시 30분에 미 공군 폭격기가 남하하는 피난민이 지나가는데 에도 불구하고 한강과 광나루 다리를 모두 폭파한다.  우리가족도  28일 서울 전농동 집을 나와 남쪽으로 향하는 피난민과 함께 광나루에 도착하니 이미 광나루 다리가 폭파되었음으로 강을 건너지 못하고 남의 집 처마 밑에서 밤을 새우고 29일 아침 돈을 주고 나룻배로 강을 건너 남하하게 되었다. 그 때는 이미 미아리에서 전투가 있었으며 부상당한 군인들이 우리와 함께 같은 배를 타고 건넜다. 정확히 말하면 부대를 이탈하여 후퇴하는 부상군인들이었다. 나는 그 당시 전농국민하교 5학년이었으며 11살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참담했던 광경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국군과 UN군의 저항이 있었지만 7월20일에는 대전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8월 18일에는 대구 북방 13마일까지 육박하여 대한민국의 운명은 남해 바다 속에 수몰되는 직전까지 이르게 되었다. UN에서는 장면 미국대사의 보고를 받고 6월 27일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즉시 38선 이북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하고 UN회원국은 침략자를 공동으로 격퇴하는 결의문을 채택한다. 결의문에 따라 7월7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UN군을 조직되고 8일에는 UN 깃발아래 전장에 참가한다. 7월 14일에는 국군 지휘권이 미군에게 넘어간다.


풍전등화의 대한민국은 UN군의 참전으로 기사회생하여 군사력이 보강되고 낙동강을 최후의 방파제로 삼는 워커라인을 결성하고 최후의 결전을 다짐한다. 극동사령관 맥아더의 명령에 따라 미 제8군의 제24사단을 이끌고 윌턴 H. 워커(Walton Harris Walker)중장이 7월 13일 한반도에 파견되어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게 된다. 워커장군은 미군들에게 ‘우리는 더 이상 물러설 수도 없고 물러 설 곳도 없다’라고 선언하고 방어선을 사수하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하면서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끝까지 한국을 지키겠다! 고 한국군에게 선언하여 한국군의 사기를 일으켜 세웠다. 결국 8월 16일에 UN군은 공군 B-29 전략폭격기의 지원 아래 대구 서남북방에 대치하고 있는 북괴 최강 제15사단의 6만 병력과 전차를 괴멸시킴으로서 개전이후 최초로 승전고를 올리고 국군과 UN군이 전세를 반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한다. Walker장군은 9월 12일 ‘한국전선 최대의 위기는 지나갔다’고 하였다. 드디어 9월15일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이 성공되고 한국군과 UN군 합동작전으로 인민군을 서울에서 몰아내고 9월 28일을 수도서울을 탈환한다.



On July 29, 1950, the increasingly dire situation prompted Walker to issue to division commanders what has become known as his “ Stand or Die” order.

We are fighting  a battle against time. There will be no more retreating, withdrawal or readjustment of the lines or any other term you choose.

There is no line behind us to which we can retreat... There will be no Dunkrik, there will be no Bataan. A retreat to Pusan would be one of the greatest butcheries in history. We must fight until the end.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또 다시 서울을 공산군의 수중에 넘어가고 다시 서울을 탈환하는 전쟁이 거듭되다가 드디어 1953년 7월27일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정전협장이 조인됨으로서 3년 1개월에 걸친 참담한 한국전쟁은 종전이 아닌 휴전협정이 조인되면서 한반도는 정전상태로 지금까지 65년째 계속되고 있다. 북한의 김일성은 애치슨라인이 선언되었기 때문에 준비가 허술한 남한을 지금 당장 공격하면 8월15일안으로 한반도를 적화 통일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6월 25일 일요일 새벽을 기해 전쟁을 일으켰으나 피비린네나는 동족상잔의 비극만 남기고 남북분단선을 그대로 둔 채 정전이 성립되었다. 이런  범죄행위를 뉘우치기는커녕 전쟁패배의 책임을 남한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난다고 장담했던 박헌영 때문이라고 죄를 뒤집어 씌워 처형하고 대를 잇는 김 씨 공산왕조 건설의 기반을 닦는 구실로 삼았다. 이제는 온 인류를 상대로 핵 위협으로 동포들과 인류공동사회를 협박하고 있다.


김일성이 일으킨 한국전쟁은 우리 동포들만의 전쟁이 아니었다. 남북한은 물론 미국, 영국, 프랑스 에티오피아 등 UN의 21개국이 한국을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으며 중공과 소련이 대병력과 최신병기로 북한을 지원했다. 이제는 또 다시 세계대전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전쟁 선진국들이 자제하는 듯 했지만 막상 한반도가 적화되거나 미국의 영향권에 들어가는 것을 받아드릴 수 없기 때문에 사실상 제3차 세계대전에 버금가는 세계대전이 되었다. 이 전쟁으로 남북한을 돕기 위하여 633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한반도 땅 전체는 그야말로 폐허가 되었으며 이 민족은 1000만 이산가족을 만들어 놓음으로 이 들의 아픔과 고통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koreanwar.jpg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600pixel, 세로 422pixel

Figure 7. With her crying children left in the bearded woods, her mother breathed and said nothing. The suffering of the Korean war continues today in this land.

              

 6.25전쟁 호국영웅들 


   공산군의 침략으로 한국이 고통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2차 세계대전의 상처가 심각한 프랑스는 국내사정으로 정부에서도 난색을 표할 때 UN참전 프랑스 부대를 이끌기 위하여 랄프 몽클라르(Railoh Monclar)중장은 기꺼이 자기의 계급을 중장에서 중령으로 내리고 프랑스 대대를 이끌고 한국에 와서 미군 23연대 소속으로 참전한다. 중공군이 징과 꽹과리로 위협할 때는 수동 사이렌으로 대응하고 적이 근접할 때는 투구를 벗어버리고 빨간띄를 두르고 총검과 개머리판을 휘두르며 육탄전으로 중공군을 제압함으로서 지평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하였다. 전투가 승리로 끝나자 몽클라르 중령은 프랑스 대대를 향해 ‘그대들은 이제 영광의 포로가 된 것이오! “ 라고 외치면서 부하장병들의 사기를 치겨 올려 주었다고 한다. 이후로 중공군이 UN군에게 함부로 덤벼들지 못하였다. 한국전쟁사에 빛나는 지평리 승전 드라마는 역전노장의 랄프 몽클라르(Railoh Monclar)중장의 군인정신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대한민국을 ’제2의 조국‘이라 불렀던  밴 플리트(James Alward Van Fleet)미 8군 사령관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최선봉에서 진격했던 역전의 노장으로 인해전술로 대드는 중공군을 상대하려면 월등한 화력으로 제압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포병의 탄약통제보급률을 5배로 하라고 명령함으로 무제한 사격이 가능하게 함으로서 중공군의 5차 공세 이후로는 보병의 산악 기동전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밴플리트장군은 6.25전쟁 중에 하나뿐인 외아들 제임스 A. 밴 플리트 주니어를 잃었다. 밴 플리트 대위는 당시 신혼이었음에도 아버지를 돕기 위해 한국전쟁에 참가하여 미 공군대위로 B-26 폭격기를 조종하여 북한군의 야간철도보급을 폭격하는 위험한 임무를 1952년 4월에 수행하다가 추락하여 실종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장군은 위험한 수색작업을 즉각 중지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는 전선의 최고사령관으로서 자신의 아들이라고 편애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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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8. Against to the human sea tactics of the  Chinese Communist penetration of the Korean War ammunition UN troops were fed five times magnification.


하지 않고 모든 부하를 똑 같이 보호하려는 지도자의 도리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전선의 지도자가 직접 노블레스 오빌리주(noblesse oblige)를 보여줌으로 부하들은 지휘자를 따르고 목숨을 걸고 따르게 하였다.


 장군은  한국전쟁동안 가장 오랫동안 미 8군 사령관으로 근무했으며 그 의 재임기간에 전선에서 물러난 일이 없었다. 한국정부에서는 그를 6.26전쟁 대한민국 호국영웅으로 추대하고 기념우표를 방행하였다.


일제 36년간 일본의 식민통치하에서 해방되면서 탄생된 신생대한민국으로서는 전쟁 수행능력을 채 갖추기도 전에 북한과 중공군의 침공을 당하게 되었지만 세계 1,2차 세계 대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역전의 노장들의 탁월한 작전수행과 장병들의 희생으로 공산침략자들을 격퇴할 수 있었음을 우리는 새삼 느낄 수 있다.


○ 귀신잡는 해병 


   이 땅의 수많은 젊은이들 또한 신생대한민국의 열악한 장비와 절박한 환경 속에서도 위급한 조국을 위해 젊은 목숨을 바치고 숨져갔다. 1950년 8월 16일 우리 국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설정하고 북한군을 침공을 저지하고 있었다. 마침 북한인민군은 삼면에서 부산을 공격하기 위해 인민군 7사단은 증강된 대대(약 650명)가 통영의 길목인 원문고개를 기습하였다. 이 때 경찰관 100여명이 원문고개를 방어하고 있었으나 인민군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야음을 이용하여 한산도로 철수해버린다. 통영은 이제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만다. 이에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은 김성은 해병대 대령에게 통영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하달한다. 명령을 받은 한국해병대의 김성은 대대는 8월 17일 새벽 장평리에 기습 상륙하여 망일봉(△148)을 선제점령하고 일부병력은 원문고개로 진출시켜 인민군의 퇴로를 봉쇄하고 총공세를 가하여 적을 완전히 섬멸하였다. 총 공세를 취하기 전에 16일에는 이성호 중령이 지휘하는 PC-703해군 함정과 512, FS, 302함정의 동남쪽에서 함포사격을 가하여 양동작전으로 적의 방어 작전을 교란시킴으로서 서북쪽에서 한국 해병대가 기습공격을 가하여 통영에 침투했던 인민군 7사단 부대는 완전히 섬멸시킴으로 인민군에게 빼앗겼던 통영을 다시 되찾는 전과를 올렸다. 이 통영지구 작전은 한국해병대가 단독으로 우리 해군 함포지원을 받으면서 수행됨으로서 UN 군이 이제까지 방어에만 급급한 상황에서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간 국토를 최초로 탈환해낸 작전이었다. 단 시간에 한국 해병대가 이루어낸 역사적인 전투로 기억되게 하였다. 마침 New York Herald Tribune지의 종군 여기자 마거리트 히긴스(Maguerite Higgins)가 원문고개를 찾아와 생생한 전황을 목격하고 한국해병대를 향하여 마귀도 때려잡을 군대다(“They might capture even devil“)라고 기사를 써서 전 세계에 알리게 된다. 이로부터 한국해병대를 ‘귀신 잡는 해병’이란 이름이 따라 붙게 되었다.


인민군을 격퇴하고 통영 시내를 장악한 김성은 대령이 부대를 순시하는데 원문고개에서 시커먼 시체 조각을 발견하게 된다. 통영반도의 유일한 공격로인 원문고개를 점령하는데 앞장선 1중대 1소대 분대장 고종석 삼등병조(병장)의 시신 조각이었다. 원문고지를 탈환하려는 인민군의 반격도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침투하는 적병과 치열한 백병전을 펼쳤고 도망치는 적병을 6명이나 사살하였다. 백병전을 치루는 가운데 고종석 분대장은 부상도 개의치 않고 전투를 계속하는데 적의 수류탄이 날아와 호에 떨어지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모두 엎드려!!! 소리 지르면서 수류탄이 떨어지는 곳을 향하여 몸을 날려 수류탄을 덮쳤다. 분대장은 산화했으나 다른 분대원은 다 무사하였다. 옆에서 분대장이 희생되는 것을 목격한 분대 원들은 분노로 가득차 참호를 뛰쳐나와 육탄전으로 적들을 격파하고 전선을 사수하였다. 그때 고종석 삼등병조(병장) 분대장의 나이는 19세이었다(해병2기생). 해병대 희생정신의 귀감이 된 고종석 삼등병조의 공훈을 기려 대통령 특명에 의해 2계급 특진되어 일등병조(중사)로 추서되었다. ‘귀신 잡는 해병’이란 말이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다. 국가 보훈처에서는 고종석 일등 병조를  6.25 전쟁 호국영웅으로 지정하였다.


  6.26 전쟁은 북한 김 씨 왕조를 건설하기 위한 구실과 한 반도를 적화시키겠다는 공산주의자들의 야망이 합작된 무모한 전쟁놀음을 벌린것이다. 중국공산당의 중국통일과 애치슨라인의 자기편의적 해석을 바탕으로 한반도 공산화를 자신하고 8월 15일안에 한반도 적화통일을 자신했던 김일성집단의 망상은 물거품이 되고 미국을 비롯한 UN군의 참전으로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낙동강 까지 남하했던 인민군은 퇴로가 차단당하여 봉쇄당한 채 국군과 UN군은 9월 28일 수도서울을 탈환하였다. 퇴로를 차단당한 인민군은 한반도 남쪽에 같히고 만다. 9월30일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관이 김일성에게 항복하라는 권고문을 보냈으나 이를 듣지 않음으로 38선 이북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10월1일 오전 11시 45분 국군 제3사단 이종찬 대령 지휘로 최초로 38선을 넘어 북진을 계속한다. 10월 19일에는 국군 제1사단이 평양을 완전히 탈환한다. 10월 26일에는 국군 6사단과 미 제24사단, 영국 여단의 합동작전으로 덕천, 회천을 지나 10월 26일 오후 65시 50분 국군 6사단 제7연대 수색대가 초산을 지나 압록강에 이르렀다. 11월 27일에는 중부전선에서 제 7사단이 국경 혜산진에 도달했고 수도 사단은 함경북도 도청소재지 청진에 돌입했다. 이로서 국토가 거의 수복되고 통일이 목전에 다다랐다. 이제 북한 공산군이 거의 섬멸상태에 이르자 10월 25일 중공군 4개 군단 50여만 명의 병력으로 고원지대를 타고 한반도로 내려왔다. 맥아더 장군이 직접 지휘에 나서 총공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29일까지 서부전선의 UN군 병력은 청천강 이남으로 철수하고 중공군에 밀려 결국 1월 4일 서울이 다시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1월 7일에는 수원이 함락되었다. 그러나 중공군과 인민군이 동상에 걸리고 식량부족등으로 인하여 전투력이 소진상태에 이르게 된다. 부대를 재정비한 유엔군과 한국군이 중공군을 다시 반격하여 격퇴시키고 북진하여 3월 14일 서울을 다시 수복하고 북진을 계속하여 38선 이북으로 진격하여 6월 6일에는 철의 삼가지대를 점령하고 동부는 고성까지 진격하였다. 쌍방 간에 제한전쟁이 반복되다가 소련의 중제로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채결되고 휴전선을 경계로 남북이 대치한 이래 지금까지 65년의 세월이 흘렀다.


-------------- 18 Jan 2017


김일성 공산도당들은 미국의 태평양 극동방위선 애치슨라인밖에 있는 한반도내에서 전쟁이 일어나드래도 미국은 내전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자행된 6.25 기습남침을 감행하였다. 적들은 그야말로 노도와 같이 밀고나가 38선을 넘은지 40여일만인 9월2일에는 낙동강까지 진격하는데 성공함으로서 김일성이 예측한데로 8월 15일 이전에 한반도 적화통일이 이루어지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6월25일 UN총회에서 북한공산군의 남침으로 38선이 붕괴되고 대한민국의 존립이 위급한 상태에 있음을 주한대사 장면의 보고를 받고 UN은 즉시 유엔안전보장 이사회를 소집하여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모든 유엔회원국은 이를 격퇴하는데 협력하라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제 82호를 의결한다. (찬성9, 반대2). 이에 따라 한국파병 UN군 총사령부가 창설되고 그 관할권을 미국에 위임하는 결의문에 따라 7월 14일 UN 깃발아래 맥아더 사령관이 공산침략군에 대항하는 전투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UN군의 지원을 받은 한국군과 중공군의 지원을 받은 북한인민군은 전진후퇴를 거듭하다가 새로운 휴전선으로 정전협정을 맺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3개월이면 적화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장담했던 김일성과 공산주의자들의 남침도발은 국토분단을 그대로 남겨둔 채 무자비한 동족살생의 만행만 저지르고 전 세계 젊은이들의 귀중한 목숨들만 앗아가는 결과만 남기고 정전이 된다. 석 달이면 한 반도를 적화통일 할 수 있다고 장담했던 김일성 공산도당들의 예측과는 달리 3년 1개월의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한국군 14만 9천명과 UN군 40,670 명이 전사했으며 부상자와 포로를 합치면 한국과 UN군 203만 6730명이 사상자를 냈다. 북한과 중공군도 이에 못지않게 429만 3000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다. UN 안전보장 이사회 결의에 따라 북한공산군의 침략을 격퇴시키기 위해 미국을 비롯하여 16개국이 군대를 파견했으며 의료진을 파견한 나라가 5개국 전쟁수행 물자를 지원한 나라가 39개국이고 물자지원 의사 표명국이 3개국이어서 총 63개국에서 한국에 침략한 공산침략군을 격퇴하는데 참전하였다. 그 당시 UN 회원국이 59개국이었다. 전 세계 모든 나라가 공산도당을 격퇴하려 한반도에 건너왔다.


  이태리는 2차 대전 전범국이라 UN회원국이 아니었음에도 의료지원단을 보내왔다. 프랑스도 2차대전시 독일과 전쟁을 치르느라 국력이 바닥상태에 있었다. 정부에서도 지원군을 파견할 계획을 세우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한 랄프 몽클라르 장군은 계급을 중장에서 중령으로 스스로 낮추고 지원병을 모집하여 프랑스대대를 이끌고 와서 중공군에 맞서 싸웠다. 인해전술로 공격하는 중공군을 총검과 개머리판으로 격퇴시킴으로서 밀리기만 하는 UN군의 사기를 일으켜 세운 지평리 전투의 승리로 한국과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부대 포창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 보훈처는 랄프 몽클라르 장군을 2015년 호국영웅으로 추대하고 6.25 전쟁 기념우표를 발행했다. 뉴질랜드에서는 원주민 마오리족도 참전했다. 창만 지참하고 참전했으나 미군이 총을 나누어 주고 사격훈련을 시켜 전투에 임하게 하였다. 에티오피아는 셀라시아 1세 황제가 자신의 친위대를 파병했다. 헝가리는 공산주의 국가임에도 반소감정으로 한국에게 물자를 지원하였다. 소련의 사주로 6.25전쟁이 일어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1950년 8월 UN 안전보장 이사회 의장국 소련의 제이콥 말리크 대표가 소련과 중공이 빠진 안보리 의결은 무효이며 한국전쟁은 ‘미국이 배후에서 조종해서 한국이 먼저 북침해서 벌어진 전쟁이다’ 라고 큰 소리를 친다. 그리고 ‘소련은 이미 1947년 북한에서 완전히 철수했으며 소련에서는 총 한 자루도 보낸 일이 없다’라고 한다. 이럴 줄 알고 장면대사로부터 건네받은  한국전에서 노획한 ‘1950년 소련제’라고 철인 찍힌 소총을 미국 측 대표 워렌 오스틴이 보여주니까 말리크는 입을 다물었다.  각국의 UN 대표들은 소련 공산당의 허구성을 직접 목격한다.

   우리 가족은 6월 28일 서울을 출발하여 도보로 또 천안에서 부터는 열차를 타고(우리가 탄 기차 위에서도 피난민들이 기차위에도 타고 내려왔다) 열흘 만에 고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곧 인민군이 내려와서 고향(전북 고창)도 인민공화국 시대가 되었다. 16세 이하는 모두 소년단에 입단되면서 우리 소년들도 날마다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 김일성 장군 노래를 열심히 부르고 인민군 찬양 이야기를 우리보다 나이가 많은 청년들이 어디서 매일 듣고와서 이야기 해준다. 그런데 우리를 지도하는 동내 청년들이 어디서 듣고 왔는지 본래는 남한에서 북침을 했기 때문에 인민군이 반격을 해서 남한까지 오게 된 것이라며 이승만이 미국과 짜고 전쟁을 일으킨 이 민족의 원수라고 강조하였다. 지금 알고 보니 소련대표 말리크와 똑 같은 말을 그들이 들려주었으며 우리도 그렇게 다른 친구들에게 그대로 또 옮겼었다. 고향에 있는 친구들은 몰라도 나는 6월 25일 서울 거리에서 휴가 장병들은 곧 바로 귀대하라는 확성기 소리를 들었으며 인민군이 남침해서 피난 온 것인데 남한에서 먼저 침공했다는 것이 얼른 수긍이 안가는 일이었다. 북한을 침공할려면서 왜 군인들은 휴가 보내놓고 빨리 귀대하라고 하느냐?  이해가 안 가는 일이었다. 이런 훌륭한 인민군이 있는지도 모르고 해도 너무 잘 못한  일을 벌였구나! 규탄 받아야 할 이승만이다! 하고 분노까지 한 것이 생생하다. 북한 동포들은 지금도 말리크의 말과 똑 같은 말을 믿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도 안타깝게도 말리크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얼간이들도 존재하는 것 같아 어이가 없다. 더욱이 6.25를 경험하지 않은 우리 후대들을 상대로 이야기하면 그대로 믿을 수 도 있어서 걱정이 된다.


○ 우리는 혈맹국 터키를 응원한다 


 터키는 미국, 영국, 캐나다 다음으로 15,000명의 군대를 파견했으며 그중 1105명이 전사했다. 그 은혜를 잊지 못해서 2002년 월드컵 때 한국국민들은 터키를 열렬히 응원했다. 터키가 중국과 조별 전을 펼치는 상암월드컵 축구장에서 4만 명의 한국관중이 다 같이 터키국기를 손에 들고 대형터키국기를 펼치며 응원하여 3:0으로 중국을 격파하게 됨으로 터키 선수들은 큰 감동을 받았다. 또한 3.4위전에서 한국과 터키는 전 세계 어디에서도, 어는 결승전에서도 볼 수 없는 감동적인 경기를 대구 월드컵 경기장에서 치렀다. 6만여 명의 한국 관중들은 태극기보다 더 큰 터키국기를 펼치고 양 손에는 태극기와 터키국기를 함께 들고 터키 팀과 한국 팀을 번갈아 가면서 응원하였다. 경기는 3:2로 터키가 승리했다. 경기가 끝나자 귀네스 터키 감독은 태극기를 들고 운동장을 달렸으며 선수들은 유니폼을 서로 바꿔 입고 어께동무를 하고 운동장을 돌았다. 감동적인 드라마가 거대한 운동장에서 펼쳐지는 것을 전 세계로 외신을 타고 전해졌다. 터키에서는 ‘이런 한국을 위해서는 우리는 다시 한 번 피를 흘릴 각오가 되어 있다. 터키는 1천명의 용사를 잃었지만 5000만의 한국인을 얻었다’ 라며 한국인을 향한 모든 찬사를 아끼지 안했다.


반세기 전에 입은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으려는 이 민족의 마음의 발로였다. 나는 직접 경기장에 없었지만 이야기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해 옴을 숨길 수 없다. 사실 대부분 우리국민들도 터키가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더군다나 67년 전 한국전쟁에 발발하기 전까지는 극동의 조그만 한국이 분단국가인지를 아는 터키국민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터키는 우리를 위해 군대를 파견하고 많은 병사들이 이 땅에서 숨져갔다. 마침 한국에서 2002년 월드컵이 거행되고 3.4 위전을 치르게 됨으로 용케도 혈맹 국가 터키국민에게 우리의 고마움을 표시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 다행이었다.


터키 말고도 우리는 59개국 국민들에게 빚을 졌으며 18만 9600명의 전사자 가족들이 사랑하는 자식과 형제들을 낫선 땅 한반도에 잃어버리고 슬픔 속에 반세기를 살아가고 있음을 새삼스럽게 돌아보게 한다. 우리들은 우리  조국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우리를 도우려 파견된 UN 참전국 장병들의 희생에 대해서는 우리는 더욱 더 안타가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자기의 계급을 여섯 단계나 낮추고 지원병을 모집하여 프랑스대대를 편성하여 이끌고 와서 300명의 부하를 잃으면서 우리를 도운 몽클라르 중령,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Stand or Die)고 부하들에게 명령하고 최후의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해준 워커장군은 전선시찰 중 우리 병사를 피하려다가 낭떠리지로 굴러 그도 이 땅에서 목숨을 잃었다. 한국전쟁을  총 지휘한 UN군 총 사령관 벤 프리트 장군, 그의 아들 역시 한국전쟁에 참가하여 공군대위로

인민군 보급로를 차단하다가 적의 고사포에 맞아 추락하였으나 위험한 수색전을 수행하는 부하들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하여 추락한 외아들의 수색전을 즉각 중단케 한 장군이었다. 부하들을 살리려고 자기 몸을 산화시킨 진두태 해병중위, 고종석 해병삼등병조등 수많은 호국영령들 덕분에 우리 조국이 오늘날의 세계인이 주목하는 번영을 가져올 수 있게 하였다.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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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9. In the 2002 Seoul World Cup, the Korean people cheered Turkey with the Turkish flag, which was bigger than the Korean flag at Seoul football stadium.

 


이제 우리는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챙겨보는 마음을 가져야 할 때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가 먹고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이러한 사실들을 망각 속에 뭍혀버리고 짐짓 외면하고 살아왔다. 나는 이번 Lima여행을 계기로 68년 전에 있었던 한반도 전쟁은 과거사 이야기가 아니고 지금 이시간도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를 돌이켜 보게 된다. 1950년 6월 28일 서울 미아리 방면에서 들려오는 대포 소리를 들으며 짐 보퉁이를 진 부모형제들과 함께 우리가 광나루 다리에 도착했을 때 비가 내리고 다리가 끊기어져서 부모님들이 낙담하고 허둥대던 일을 나는 어제 일 같이 떠오른다. 수원을 지나는데 호주 전투기가 북쪽을 향해 날아가는 광경을 우리 피난민들이 바라보면서 ‘우리를 살려주려고 오는 전투기가 왔다’ 소리치면서 손뼉을 쳤던 광경도 역력히 기억 난다. 전쟁터로 가려고 대전역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경찰과 군인들의 비장한 눈길들을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은 모습으로 남아있다. 서울에 남아있던 우리 숙부님도 1.4 후퇴 때 서울에 남아 계시다가 철수하는 북한군에 끌려간 후 지금까지도 생사를 모른다. 지금도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한 겨레가 긴장 속에 대치하고 있다. 그 때 자식을 잃고 남편을 잃은 수백만의 가족들은 이 순간에도 고통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엊그제 내가 만나고 온 Juanita의 남편인 Shaw대위도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녹번리 전투에서 목숨을 바친 호국영웅이다. Juanita 여사는 남편을 잃고 잠시 실망하였으나 그녀의 굳센 의지와 신앙으로 슬픔을 떨치고 일어나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1956년 한국에 다시 와서 외국인 학교 교사로 봉직 하면서 이대에서 사회사업학과를 신설하고 의료봉사를 통한 사회봉사 운동을 시작으로 한국에서 봉사활동을 하였다. 퇴임 후에는 고향에 돌아가 두 아들을 교육시키고 이제까지 고향마을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아들 Stephen 판사가 제 작년 그가 근무하는 Lima에 모시고 와서 노인 요양 마을 Otterbein에 계신다. 미국 국민들도 국민들의 실속을 챙길 수 있게 하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을 선택하였다. 나도 잠시 Juanita의 입장으로 돌아가 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1950년 6월 한국전이 발발할 때의 William Hamilton Shaw의 처지를 다시 되돌아보게 된다.



○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윌리엄 해밀턴 쇼와 그의 가족들

   (William Hamilton Shaw, who loved Korea more than a Korean)


William Hamilton Shaw는 한국에서 태어났고 한국에서 자랐으며 그 짧은 생애의 대부분을 한국에서 보냈으며 한국어도 유창하게 잘 했다. 평양사투리인지 서울 말씨 인지도 분간할 정도로 한국말을 잘 구사했다. 모습은 외국이었지만 행동거지는 한국인이었다. 그러나 국적이 한국은 아니다. 한국으로 파송된 미국 선교사의 아들이며 미국인이다. 그리하여 미국국민으로서 4년간 해군에 복무하고 제대한 예비군 해군중위의 신분이다. 제대 후 4년간 신생 대한민국의 탄생을 위해 해안경비대사관학교(해사) 교관으로 미 군정청 ECA 요원으로 대한미국 해군과 해병대 창설과 신생대한민국의 경제자립을 돕기 위해 헌신했다.


   이제는 공부를 좀 더 하기 위해서 하버드 대학원에 입학하고 다음 학기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침 메사추세스 이스트 브렌트리(East Braintree) 감리교회의 학생 목사로 6월1일 임명되어 목시관으로 이사하여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모처럼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됨을 감사하게 생각하였다. 그런데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이 남침했다는 단파 방송을 듣고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났음을 알게 된다. 그에게 한국전쟁에 대한 의무는 없다. 그러나 부모님이 현재 한국에 선교사로 계시고 바로 어제 까지 해사 생도들을 가르치다 왔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서 한국에서 자랐다. 한국말을 나보다 잘 할 수 있는 미군도 없다. 주아니타와 함께 고심하다가 결국 결단을 내리고 7월11일 워싱턴에 가서 군에 복귀하겠다고 신고하고 돌아와서 한국에 계신 부모에게 자기의 결심을 알린다.


  미 국방부에서는 한국어에 능통하고 한국의 해안지리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쇼 대위를 미 극동사령부 맥아더 장군 직속 해군정보장교로 임명하여 1950년 8월 2일 도교에 있는 사령부로 파송한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후에는 서울탈환을 목표로 진격하는 미 해병 1사단 5연대 정보장교로서 미 해병대와 함께 녹번리 전투에 참가하여 작전 중 9월 22일 정오 백련산 입구 냉정 골에서 적의 기습공격을 받고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쇼 대위의 전사소식을 들은 쇼 선교사의 친구들은 모두들 놀라고 안타가워 했다. 특히 이스트 브렌트리 교회 교인들은 부임한지 한 달도 못되어 한국전이 일어나서 해군에 재입대하게 되었다면서 교인들과 작별인사를 한지가 바로 엊그제 인데 전사소식이 너무나도 빨리 날아왔다. 우리의 기준으로 말하면 불효막급한 일을 이 아들이 저지른 것이다. 禮記에 이르기를, 父母存 不敢有其身, 不許友以死(부모존 불감유기신, 불허우이사)이라 안했던가! 부모님이 생존해 계시면 자식은 자기 몸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친구 때문에 목숨을 거는 일을 허락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부모 앞에 자식이 먼저 가면 이 보다 더 큰 不孝(불효)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이란 나라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가족도 버리고 부모도 버리고 교인들도 버리고 떠나더니 전사소식이 이렇게 빨리 전해오게 하는가? 얼 쇼 선교사의 친구들이며 친지들도 나무라고 원망하고 안타가워 했었음을 충분히 짐작이 간다. 상륙한 후에도 그렇다. 해군정보장교라고 해도 꼭 맨 앞에서 앞장서서 갈 필요가 꼭 있었는가? 맨 앞에 가다가 전사했다고 하니 더욱 더 안타깝다.


그런데 9월15일 인천상륙후 서울로 진격하는 동안 한국사정을 잘 모르는 미 해병대는 수상한 한국인이면 모두 인민군으로 알고 모두 살해해버리는 경우가 자주 발생했다. 남루한 옷차림의 시민과 위장한 인민군을 한국말 한 마디도 모르는 미 해병대 장병들이 구분해 낸다는 것은 급박한 전쟁터에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쇼 대위는 평양말로 물어봐서 평양말투이면 인민군이고 서울 말씨면 대한민국 국민이다 라고 정확하게 가려내어 인민군이면 포로로 처리하고 민간인이면 방면하였다. 미 해병대가 모두 총살 해버릴 번한 민간인을 쇼 대위 때문에 수십 명 목숨을 건져냈다. 쇼 대위는 내가 여기에 오기 참 잘했다고 생각하고 최 첨병 수색조의 해병과 함께 전진하면서 시민들에게 주위 상황도 물어보면서 전진하게 된다.


  그는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났다고 해도 외면할 수 도 있었지만, 외면하지 못했다. 그는 이미 미군에서 4년간 해군으로 복무했고 제대 후에는 한국 해안경비대 사관학교 교관으로 4년간 봉사하면서 신생한국 창건에 헌신하였으며 지금은 학업 중에 있으면서 또한 한 교회의 교역자임으로 재복무 신청을 하지 안 해도 되었지만, 전쟁 발발 후 2주일 만에 망서림 없이 재복무 지원을 했다. 그가 미 해병대에 파견된 미 해군정보장교로서 수색작업을 수행하는 첨병과 함께 가장 위험한 위치에서 전진 안 해도 되었지만, 그는 가장 위험한 위치에서 첨병 해병과 함께 임무를 수행하다가 먼저 적의 공격을 받아 전사했다.


  그는 조선 민족끼리의 동족상잔의 전장에 참여하지 안했어도 되었지만,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하였다. 죽지 안 해도 될 사람이 한국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한국인 친구를 위해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는 한국국적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공부하고 있는 입장이었지만, 현재 교회사역자이지만,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이 있지만, 걱정하고 계시는 부모님이 살아계시지만 오직 주님의 명령 따라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망설임 없이 한국전쟁에 참전하였고 한 달 20일 만에 전사했다. 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가장 힘들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4년간 복무를 마치고 멀쩡히 살아 돌아 왔는데 한국전쟁에 참가한지 한 달 만에 전사하고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가버린 것이다. 차라리 그가 한국인 이었다면 재입대해서 전사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외독자이기 때문에 군대면제자 이기도하다. 또 외국에 가서 공부중이며 이미 제대했는데 다시 재 입대까지 하는 한국인들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자식을 군데에 안 보내기 위해 두 아들 중 한 아들은 아들이 없는 집안으로 양자 보내고 남은 아들은 자동적으로 외독자가 됨으로 두 아들 모두 군 면제 시킨 정치지도자도 있으며, 외국에 나가 공부하는 젊은이들이 병역의무 연령이 되면 국적을 포기하고 군 면제한 공직자들의 자녀도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는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Greater love has no one than this, that laydown his life for his friends. John 15:13)’


주님의 명령 따라 우리를 위해 지체 없이 달려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주님의 계명을 목숨으로 지키고 우리 곁에 잠들어 있다.


 Juanita 여사는 2010년 6월 22일 서울시 은평구 평화공원에서 거행되는 ‘윌리엄 해밀턴 쇼 동상제막식’ 에서 그의 며느리를 통해 보내온 유가족 답사를 통해


‘저희 남편 윌리엄 해밀턴 쇼는 비록 짧은 생애였지만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인을 가족으로 생각하고 무엇보다도 한국을 제2의 고향으로 여겼던 그를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리고 그가 묻힌 한국을 진정한 ’고향‘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The honor you bestow on William Hamilton Shaw at this time reenforces the conviction he held throughout his entire short life that he loved Korea, felt a kinship with its people, and considered Korea to be his second homeland. He was born and raised and worked and died in Korea, where he is now buried. Those facts confirm his feelings that he is rearly was “at home” in Korea’. 22 June, 2010

-Juanita R. Shaw-)   


 큰 자부 카메론 쇼(Carole Cameron Shaw)는  ‘저희 시아버님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는 28살의 나이로 서울에서 전사하셨습니다. 아버님에 대한 기억과 아버님이 지켜내려고 했던 소중한 것들이 아버님이 태어나고 자라셨던 평양에서도 환영받는 날이 하루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자유를 사랑하는 관련된 모든 나라들이 평화롭게 남북이 통일될 수 있도록 협력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캐럴 카메론 쇼-


(‘LT. William Hamilton Shaw died here in Seoul at 28 years old. May the day come soon- when his memory and what he stood for will be welcomed in his home of Pyongyang where he was born and raised. And may the lovers of freedom, from all relevant countries, peacefully unite this country.‘ -Carole Cameron Shaw, 22 June 22, 2010, Seoul Korea-)


그 아내와 그의 며느리다. 고전부전(姑傳婦傳)이다.


  주아니타(Juanita) 여사는 남편이 한국전선으로 떠나자 생후 6개월 된 스티븐과 6살 된 빌과 함께 Ohio 그의 친정 부모님 집에서 있다가 전사소식을 들었다. 절망 속에서 방황했지만 굳센 믿음과 결단으로 아픔을 털고 일어나 남편이 잠들어 있는 한국에 1956년 감리교 선교사 자격으로 두 아들과 함께 다시 한국에 온다. 서울 외국인 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한국에서 좀 더 적극적인 봉사활동을 위해 그녀는 안식년을 이용하여 1963년 Case Western University에서 사회봉사석사학위(Master of Social Work, MSW)를 취득하고 이화여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세브란스 병원에 의료사회복지과를 신설하여 한국에서 의료사회복지 사업이 도입되는데 헌신적으로 기여했다. 주아니타 여사는 미국감리교 세계선교부에서 파송된 전문의료사회복지사 자격으로 전문적인 임상의료사업활동을 한국에서 처음으로 시작한 분이다. 의료복지 사업이란 전인적인 치료(total care)를 위해 질병의 원인이 되거나 치료효과를 방해하는 심리사회적 어려움, 가족관계의 어려움, 경제적인 어려움, 사회복귀 및 재활의 어려움을 해결하는데 필요한 전문적인 상담서비스를 수행한다. 이를 위해서 취약계층 진료비 지원 사업, 가정간호사업, 의료소외계층 진료비 지원, 지역사회 봉사 관리 등을 담당한다. 주아니타는 한국전쟁으로 인한 미망인, 고아, 월남 피난민, 외국인 환자들이 겪는 고통을 덜어주고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의료복지사업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또 그에 대해서 준비했음을 알 수 있다.

그야말로 부창부수(夫唱婦隨)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sevrancewillie.jpg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1444pixel, 세로 902pixel

사진 찍은 날짜: 2010년 05월 29일 오후 13:17

카메라 제조 업체 : HP

카메라 모델 : HP Scanjet e709n

프로그램 이름 : Adobe Photoshop 7.0

색 대표 : sRGB

채도 : 낮음

선명도 : 낮음

EXIF 버전 : 0220

Figure 10. Juanita R. Shaw established a medical department at Severance Hospital and led her students on 1963.



   그 녀는 1968년 15년간의 한국에서의 선교사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게 된다. 큰 아들 윌리엄이 아버지가 못 다한 공부를 보상하겠다는 마음으로 역시 아버지 지도교수였던 라이샤워 교수 밑에서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으며 둘째 스티븐이 서울 외국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제는 그도 미국에서 대학에 입학해야 하기 때문에 한국 근무를 마치게 된다. 그의 시아버지 얼 쇼 선교사도 이미 1961년 41년간의 한국에서 선교사 봉사를 마치고 정년(71세)이 되어 아데린 여사와 함께 귀국하였는데 그 당시 하버드 대학병원에 입원하여 병중에 있기 때문에 주아니타 혼자 한국에 남아있을수가 없었다. 다음 해에 쇼 선교사가 별세하고 연이어 아델린도 별세하고 그 들의 유해는 모두 양화진에 있는 아들 곁에 묻힌다. 이 후로 주아니타 여사는 두 아들을 대학 졸업시키고 결혼시키면서 오하이오에서 지금까지 혼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재작년 2015년 정부에서는 6.25 전쟁 호국영웅 10인을 천거하고 그분들의 가족들을 초청하여 위로하고 기념우표 발행했었다. 마침 윌리엄 해밀턴 쇼 가 호국영웅으로 추천되고 그의 가족을 초청하는데 박근혜 대통령도 리셉션에 참가하기로 계획 되었다. 초청받은 쇼 판사는 영광스럽게 초청에 응하기로 하고 이왕에 한국에 오게 되면 2014년 9월에 해군사관학교에 새로 건립된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 흉상도 참관하고 한국친구들과 함께 은평 평화공원 쇼 대위 동상도 참배하는 일정을 마련하기 위해 내가 중간에서 관계부서와 연락해서 한국에서 July 23-28 스케쥴을 조정하는데 도와주었다. 그런데 주아니타가 폐렴과 심부전증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마침 한국에서 메르츠 감염사태로 인하여 박근혜 대통령이 미국방문을 취소하는 등 어려운 국내환경이 겹치게 되었다. 특히 쇼 판사는 병환 중에 있는 노모가 계신데 감염위험이 있는 한국여행을 감행한다는 것은 큰 부담이 되었다. 그의 입장을 알게 된 모든 한국 친구들은 모두들 쇼 판사가 오지 않는 것이 오히려 좋겠다는 의견들이 모아졌다. 그리하여 내가 쇼 판사가 이번에 오지 안 해도 미안해 할 필요가 없으니 결단을 내려서 여행을 취소하라고 권면하는 메일(July12,2015)편지를 보냈다. 결국 쇼 판사는 여행을 취소한다고 보훈처에 연락하고 보훈처에서도 이러한 형편에 외국에서 가족들을 오라고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판단으로 행사를 10월 달로 연기하고 국내의 인사들만 주로 참석하여 기념행사를 마쳤다. 그 대신 보훈처에서 준비했던 기념품과 기념우표 함을 쇼 가족에게 우편으로 보내주었다.


   이제는 우리가 빚진이들 에게 와서 축하를 받으라고 하는 대신 찾아가서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 성숙한 국민이 되어야겠다. 내일 모래 구정을 맞이하여 민족 대이동이 이루어지고 한편으로는 구정 연휴기간을 통하여 해외로 나들이 하는 국민들이 53만 명에 이른다고 TV 뉴스가 전한다. 최근에는 미국으로 여행하는 한국인 관광객이 한해에 145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특히 한국인 관광객에 대해서는 미국비자 면제프로그램(VWP, Visa Waiver Program)이 적용되어 웹사이트를 통해 전자여행허가제(ESTA, Electronic System Travel Authorization)를 받으며 미국 각 중요 도시로 직행하는 7개 항공사가 운행되고 있다.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웅들의 가족을 위로하고 다음날 돌아올 수 도 있는 형편이 되었다.



 □ Out or Die! 


   무모한 김일성 공산집단이 일으킨 전쟁으로 이 강토는 풀 한포기 날 수 없을 정도로 폐허화 되었으나 우방국들의  원조와 우리국민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자손들에게만은 더 이상의 고난과 가난은 물려주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반세기동안 땀 흘린 결과로 전 세계인이 놀라는 경이적인 경제건설을 이루어내었다. 1953전쟁당시는 GDP통계도 없었으며 폐허를 딛고 일어서면서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 라고 외치면서 국가 지도자와 국민이 한 덩어리가 되어 피 땀 흘려 나라를 다시 세우기로 결심을 했다. 1970년 그 당시 1인당 GDP는 254 달라 였다. 온 국민이 피 땀 흘려 노력한 결과, 30년 후 2000년에는 1인당  GDP는 1만 달러를 넘어 1만1349달라가 되고 한국은 세계 14위의 경제규모를 가진 산업국가로 발전하게 되자 세계인이 다 놀랐다. 2016년 말 현재 한국은 세계 7위의 수출국이 되었으며 GDP는 11위, 1인당 GDP는 27,195달러로 전 세계 211국가에서 28위의 잘사는 국민의 대열에 오르게 되었다.


  이 같은 한국의 발전을 보고  하버드대 Samuel Hundington 교수는 ‘한국인들의 검약, 투자, 근면, 교육, 조직, 기강, 克己정신이 하나의 가치로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고 했다. 우리 자신들이 뒤돌아보아도 그랬던 것 같다. 우리는 이제 원조를 받는 수혜국에서 1987년부터 원조국(ODA, 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이 되어 2015년도에는 19억 1100 달러를 오히려 개발 국가에 기여하였으며 점차 그 비중(GNI)을 늘릴 계획을 갖고 있다.


   1950년 북한공산군의 남침으로 국가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에게 군대를 보내고 의료진을 보내 도와준 19개국 중에서 7개 나라를 제외한 12개국 국민들은 우리보다 1인당 GDP가 뒤지고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빚진 국민들에게 빚을 갚아야 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 때 우리를 위해 싸우다가 목숨을 바친 형제들의 부모들과 배우자들을 우리가 할 수만 있으면 찾아가 위로를 드리고 도와줄 책무가 우리에게 있다. 옛 성현도, 久要不可忘 薄終義所尤(우리가 잊지 말 것은 나중에 가서 야박하게 굴지 말아야 한다)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를 위해 가장 소중한 목숨을 바쳤다. 예수님도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었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What good will it be for a man if he gains the whole world, yet forfeits his soul? Or what can a man give in exchange for his soul? - Mathew 16:26-27)


라 말씀했다.


우리는 일부러 찾아가서 위로하고 인사라도 드리고 와야 한다. 2015년 김무성 새누리 당대표가 미국에 가서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고 한국을 구해주고 전사한 Walker 장군 묘지에 참배하러가서 우리 예절 데로 일행과 함께 큰 절을 올린일은 참으로 莊한 일이었으며 미국 국민들에게 크나큰 감동을 주었었다. 그런데 이를 가리켜 過恭非禮(과공비례)라고 비아냥거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 웃어른이나 부모님한테는 큰 절을 올리는 것이 우리의 기본예절이다. 우리나라가 풍전등화 앞에 섰을 때 죽기 아니면 살기다(Stand or Die)라면서 UN군과 한국군 병사들을 격려

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끝가지 死守함으로서 대한민국을 파멸직전에서 구해내 준 나라의 큰 은인의 영정 앞에 큰 절을 하지 않고 누구한테 하란 말인지 납득이 안 간다. 이번 설날에 영국 프로축구 EPL의 손 흥민 선수가 극적인 역전골로 팀을 승리로 이끈 뒤 성원해준 관중과 고국의 부모를 향하여 큰절로 새배를 올리는 것을 보니 대견스럽고 장해 보였다. 이 또한 우리들을 도와준 전 세계 국민들에게 보답하는 우리 국민의 진심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우리는 지금 전 세계 211개 국가 중에서 유일한 분단국 국민이다. 분단된 민족으로서 같은 민족끼리 살길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대신 온 세계 국민들에게 불안과 재앙을 일으키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다. 북쪽의 김정은 도당은 핵과 ICBM으로 인류공동사회를 협박하고 날마다 남침기습전쟁 훈련에 광분하고 있는 이때, 남쪽에서는 대통령을 탄핵하고 감금시켜 놓고 매일 같이 국정농단 사태를 파헤치는 일로 온 나라가 국가적 혼란사태에 있어 국민적 역량을 분산시키고 국가동력이 멈추어져 있다. 그야말로 엔트로피(entropy) 절정상태다. 800만 해외 동포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고 어려움을 당할 때 도움을 아끼지 안했던 우방국 국민들에게는 허탈감을 안겨주는 추한 모습들을 전 세계 국민들에게 보이고 있다. 대통령의 탄핵정국으로 국민들은 구심점을 잃고 방황하게 만들고 있으며 또 다른 국가적 위기상황을 자초하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한결같이 민족주의, 외세배격, 평화통일, 정의구현, 인도주의 등으로 위장해 엔트로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손흥민새배.jpg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04pixel, 세로 198pixel

사진 찍은 날짜: 2017년 02월 07일 오후 11:52

프로그램 이름 : Adobe Photoshop CS3 Windows

Figure 11. On the Lunar New Year's Day, Sohn Heung-min will lead his football team to victory and will bow to the parents of their homeland on the playground (2017.28.18).




피를 증가시켜 결국은 民衆혁명으로 정권붕괴를 획책하는 시나리오로 행동하는 집단들이다. 이 시나리오로 중국과 월남이 적화되었으며 예멘도 마차가지며 오직 독일만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짐으로 이 시나리오를 입증할 기회가 사라진 것이었다. 대통령을 탄핵정국으로 몰아넣고 국가동력을 꺼버리고 있는 이 상태는 매우 위태로운 상태임을 우리국민들이 똑 바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정치지도자들은 혼란을 하루 속히 수습하고 국민들을 바른 방향으로 끌고 나가려고 하는 대신 언론 및 대중매체와 동조하며 혼란사태를 부추기고 있다. 대부분의 국민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국민을 선동하는 세력들은 광화문 광장에 모인 촛불인파를 과대 포장하여 대통령 탄핵이 국민의 뜻이라 선동하며 국민을 오도하고 있다. 지난 12월26일 제6차 촛불시위 때에 190만 인파가 모여 대통령탄핵촉구를 요구했다고 언론들이 보도했으나 미 국방부 인공위성이 판독한 그 날의 총 집결인원은 113,347명으로 집계되었다. 무려 17배나 뻥튀기해서 촛불시위자 연인원이 1000 만 명이 넘었음으로 대통령 하야는 전 국민의 뜻이라는 논리다. 그런데 시위에 참가한 자들은 대부분 동원된 인파이며 같은 참여자가 매번 참여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그런데 대통령탄핵을 심판했던 청문 국회의원들, 특검 검사들, 헌재 재판관들의 대통령은 누구인가요? 이 들은 국록을 안 먹는 사람들인가요? 대통령이 잘 못 정치를 하면 자기들은 책임이 없는가요? 대통령이 정치를 잘 하는지 못하는지 보아두었다가 잘 못하면 호통치고 야단치고 벌을 내리는 것이 국록을 먹는 공직자들의 본분인가요? 옛 성현은 天子有爭臣七人 雖無道 不失其天下(천자가 간하는 신하 7명만 있어도 비록 천자가 무도할 지라도 천하를 잃지 않는다) 했다. 이 나라의 녹을 먹는 신하로서 대통령을 보좌하면서 간쟁(諫爭)할 수 있는 신하가 7명도 없다는 이야기 인가요? 국무위원, 국회의원, 청와대 보좌관, 민정관들이 대통령을 탄핵하기에 앞서 먼저 국정문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먼저 간쟁을 할 수 있는 시간적, 법률적, 제도적, 정치적, 사회적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국정농단을 막을 수 없었던 가요? 대통령을 보좌하는 책임 있는 고위 공직자 가운데 대통령의 국정농단을 눈치 채고 대책을 세울만한 안목과 소명감이 있는 공직자가 한명도 없었다는 건가요? 일반국민은 납득이 안 된다. 그리고 현재 몇 달째 대통령탄핵을 추궁하고 있는데 대통령이 탄핵될 만큼 국정을 크게 잘 못 다룬 것이 무엇인지도 우리 국민들은 납득이 안 간다. 


   2010년 북한 김정일이 우리 해군의 천안함을 폭파함으로 해군장병 46명이 수장되고 연평도 포격으로 해병대와 민간인 10명이 살상되는 도발행위를 저질렀는데도 이명박 대통령은 “단호히 대응하되 확전되지 않도록 하라‘라고 지시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를 보고 김정일 집단은 더욱 더 방자하게 핵실험을 3차례나 실시하고 더욱 더 도발적으로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SLMB),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발사실험을 보란 듯이 자행해도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를 두고 일부 야당지도자들이 이명박 대통령이 박왕자 씨 사건으로 금강산관광 중단조치를 내리는 등 북한에 대하여 너무 강경조치를 취하게 됨으로 북한이 더 도발적으로 나오고 있다고 하면서 햇볕정책으로 달래는 방향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스럽기 그지없다. 달랜다고 들을 그들이 아님을 반세기 동안 겪어본 국민이면 다 알고 있다. 현명한 정치인인양 국민들을 우롱하는 정치인들이 우리사회에 널려있다. 이 대통령이 강경정책을 펼친 다기 보다 오히려 ’바지사장‘이라고 걱정하는 국민들이 더 많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북한이 2016년 1월 제4차 핵실험을 실시하자 개성공단을 즉각 폐쇄하였으며 제5차 핵실험을 실시하자 북한주민을 향해 북한정권이 무너질 날도 멀지 안했으니  ”남한으로 오라, 대한민국은 열려있다! “ 라고 선언했다. 과거 20년 동안 어느 정권도 감히 할 수 없는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를 속 시원하게 선포한 지도자의 목소리를 우리 국민들은 처음 듣는다. 법과 원칙에 따라 통진당을 해산시키고, 전교조를 불법화했으며, 전시작전권을 연장해 놓았으며, 사드(THAAD)배치를 선언했다. 학생들의 국정교과서로 배우도록 했다. 역대 대통령들이 실천하지 못한 과제들을 박대통령이 비로서 수행했다. 우선 국방을 튼튼히 하고 자유민주화사회를 지키기 위한 기본 틀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긴급한 국가시책들을 수행해 나갔다. 이러한 조치들은 좌경화 세력과 북한정권들에게 타격을 주는 시책들이었다. 이는 분명히 이번 대통령 탄핵을 획책하는데 원인으로 작용했음이 틀림없다. 촛불집회 광장에 ‘이석기 석방’을 외치는 무리들이 함께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지금은 글로벌 시대다. 안보, 통상, 문화, 과학기술, 지구환경보존을 위해서 전 지구적으로 대처하고 수행해야 한다. 한 국가만으로는 단독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글로벌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도 박근혜 대통령이 국제적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또한 성과도 거두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북한의 망동을 제어하기 위해 중국과 러시와 월남의 협력을 유도하였으며 우리기업의 해외수주활동을 도와주기 위해 필요한때에 해외순방도 적극적으로 수행하였으며 괄목할 만한 경제적 성과를 달성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 결과 수출 주도 산업국가인 대한민국의 GDP는 2013년 이명박 정부 때 15위였는데 박근혜정부들어 2016년 현재 11위로 4단계나 도약했다. 특히 2013년 GDP 8위의 러시아, 우리는 15위였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 들어 2015년에 러시아 13위를 제치고 비로소 우리가 11위로 도약했다. 대한민국은 2016년 현재 세계 8위의 수출대국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1인당 GDP도 대한민국이 28위, 러시아 72위, 중국 74위, 북한이 138위이다. 한국전쟁으로 우리를 폐허 속으로 몰아넣었던  모든 공산주의 국가들 보다 우리국민은 수십 배 더 잘 사는 국민이 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우리국민이 그 동안 피와 땀을 흘린 결과이지만 국민들을 이끌고 앞장서준  지도자들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도 북한과 다를 것이 없었을 것이다. 특히 우리가 우리 스스로 뽑은 박근혜 대통령이 국가의 안보, 경제, 서민생활, 국제협력등 모든 면에서 지금까지의 어느 대통령보다 더 많은 헌신을 했으면 했지 못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확실하지도 않은 한 여인의 국정개입을 트집 잡아 성급하게 대통령 탄핵을 결정하고 국제적으로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이때에 국정을 중단시키고 국가동력을 끊어버리는 망국적 탄핵정국을 스스로 자초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 실로 한심스럽다. 북쪽의 김정은 집단이 좋아할 짓만 우리 정치지도자들이 골라서 하고 있다. 진정으로 이 민족이 탄핵해야 할 민족의 범죄자가 누구인지를 몰라서 그러는가?


  우리는 지금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국 국민으로서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맞대고 무려 68년 동안 대치하고 있는 민족이다. 북쪽의 김정은 집단은 이 시간도 핵과 ICBM으로 전 세계인을 위협하면서 지하에서는 땅굴로 우리의 턱밑까지 파고들어오고 있으며  지상으로는 남한기습 전쟁연습으로 광분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남쪽의 대한민국에서는 한 여인의 국정논단을 파 해치기 위하여 국가의 통수권자를 청와대에 감금시켜놓고 온 나라를 탄핵정국으로 몰아넣고 국정을 마비시키고 국정혼란을 스스로 자초하고 국력을 소진하고 국가파탄의 위기상태로 몰고 가고 있다. 선진 민주주의 국가에서, 특히 대통령중심국가에서는 대통령을 탄핵하고 국정 중단시켰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가 없다. 우리가 선진 민주국가들 보다 안정되고 평화롭고 안보상황이 보장된 나라인가요? 비록 국정농단이 감지되었다 해도 이를 바로잡도록 먼저 보필하는 참모들이 간하고 간해도 안 되면 그 때 가서 탄핵을 시도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뭐가 그렇게 급했는지 세월호 참사가 있던 날 청와대에 있는 대통령의 7시간동안 일정을 분단위로 밝혀야 국정농단이 해결되는 것 같이 밀어붙이면서 서둘러 탄핵을 결정해 놓고 근거를 잡는다고 머리를 굴리느라 온 나라 살림을 다 파헤치고 공직자, 기업인, 교수 등 수많은 국민들을 수시로 불러들이면서 이 사회를 혼란의 와중으로 몰아가고 있다. 오히려 정치지도들이 기본을 무시하고 성급하게 몰아붙이는 정치행태를 더욱 더 경계해야 할 일이다.


세월호 참사의 근본적 원인도 기본을 무시하고 조급하게 배를 몰았기 때문에 일어난 참사다. 물위를 운행하는 모든 선박은 무게()와 부력()이 평형을 이루는 상태에서 운행된다. 배가 기울어지드래도 부력의 중심이 이동해 무게와 짝힘(couple)을 이루면서 본래의 위치로 되돌아 갈려는 복원력(restoring force)이 작용하여 배가 바로 설수 있다. 배의 무게중심이 윗부분에 있으면 위험하다. 그런데 세월호는 본래 일본에서 사용하던 배를 구입해 다가 갑판을 개조해 객실을 증축하면서 무게중심이 위로 올라가게 했다. 사고가 난 날은 안개가 자욱해서 항로를 이탈해 운행하다가 조류가 빠르기로 유명한 진도 맹골수도 위험 지역을 지나면서 경험도 미숙한 3등 항해사가 진로를 바꾸기 위해 우현으로 급히 배를 회전하게 되자 1157톤에 달하는 290대의 차량과 컨테이너가 원심력을 받아 좌편으로 미끄러지면서(차량들을 묶지 안했기 때문에) 무게와 부력이 메타센터(meta center)를 중심으로 반대방향의 토크(torque) 즉 배를 더 욱 더 기울어지게 하는 네거티브 복원력(negative restoring force)을 일으켜 배가 점점 더 기울어지면서 결국은 침몰되고 만 것이다. 이렇게 기울어지는 배는 아무도 말릴 수 없다. 한쪽으로 밀린 차량들과 컨테이너가 출입구와 창문을 막아버리면 그 안에 있는 승객들은 나올수도 없고 수장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이 그 자리에 있어도, 7시간 안에 사고해역에 도착했어도 뾰족한 방법이 없다. 그 배에 탄 승객들만 물속에서 숨이 막혀 죽어갈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이런 사태를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명백하다. 배를 함부로 개조해서는 안 되고 탑재하는 차량도 단단히 묶고 운행해야 한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배를 운행하는 항해사, 선장이 배가 움직이는 물리적 원리를 정확히 숙지하고 운용해야 한다. 위협지역에서는 선장이 잠만 자지 말고 직접 조타실에 나와 지휘를 해야 한다. 매뉴얼만 익혀서 항해하는 미숙한 항해사에게 맡기면 이런 사고를 또 낼 수 있다. 덩치가 큰 배라고 물리법칙에 따르지 않은 물체는 하나도 없다. 이런 사고가 일어나게 된 물리적 현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인간이 만들어 놓은 법률조항에 따라 조치를 잘 못 취해서 어린생명들이  수장되었다고 챔임을 묻기 위해서 국가의 통치권자를 향하여 청와대에서의 7시간을 분 단위로 보고하라고 윽박지른 것은 무식하고 무례한 난동자들의 행위일 따름이다. 2016년 4월 22일 여수 율촌역으로 향하는 무궁화 제 1517 열차가 과속으로 달리다가 탈선하여 기관사 자신은 죽고 승객 8명은 부상을 당 했다. 이 경우도 선로가 직선이 아니고 곡선이기 때문에 시속 50 km/h로 운행해야 하는데 127km/h로 달리다가 기차가 탈선하여 전복되었다. 회전반경은 그대로 이지만 속력이 2.6 배 증가하면 원심력( )이 6.7배나 커지면서 바퀴가 선로 밖으로 밀려 나면서 전복되었다. 실수라기보다 이 기관사도 물리현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기본을 지키지 않고 서두른 것이 원인이었다. 달리는 자전거도 급히 회전하면 바깥쪽으로 넘어지는 것과 똑 같은 이치다. 우리가 올 바른 사회를 지탱해 가기 위해서도 무엇보다도 우리 모두가 기본을 중시하고 이를 철저히 지키려는 노력들이 우선되어야 한다. 옛 성현도 君子務本 本入而道生(군자무본 본입이도생)이라 했다. ‘근본에 충실하면 살길이 생긴다’ 했다. 세월호 항해사도 무궁화호 기관사도 자연의 이치를 숙지하고 기본을 지키면서 회전 구간에서 좀 더 천천히만 달렸더라면 그 많은 어린생명들도 자기의 생명도 잃지 안했을 것이다.


 이왕에 사고를 당했으면 신속하게 대응해서 사태를 수습해야 함은 당연하다. 재난구조를 위해서는 멀리 있는 대통령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선장이, 승무원이 해경이, 해군함정들이 현장에서 신속하게 대응하며 예리한 판단력과 결단력을 발휘하여 최선을 다하고 사태를 수습한 후에 대통령에 보고하면 된다. 장수가 군영에 있거나 위급할 때는 임금의 명령도 받지 않는다고 했다. 君命有所不受(군명유소불수)라 안했는가? 대통령 지시의 적절성과 신속성 여부가 대통령 탄핵의 핵심이 된다는 것은 난센스에 불과하다. 그런데 청문회 국회의원들이 ‘세월호 7시간’이란 팻말까지 가슴에 차고 이를 밝히는 것이 대통령 탄핵을 위한 중대한 국정실패의 핵심인양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기관(可觀)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억지가 모자라서 신성한 국회의사당에서 현직 국가원수의 나체 패러디를 내다걸고 나라망신을 다 시키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국록을 먹는 국회의원들이 국가원수를 깎아내리고 국정을 혼란에 빠뜨림으로서 국가동력을 멈추게 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2차세계 대전을 일으키고 패전했으면 패전한 나라가 분단되고 고통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 독일이 동서독으로 분단되었듯이 일본이 남북으로 분단되었어야지 한 반도가 대신 남북으로 분단되고 배트남이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분단된 두 나라는 이념분쟁의 희생으로 동족끼리 피눈물나는 전쟁을 치루고나서 베트남은 결국 1976년 적화통일 되었다. 당시 베트남의 군사력은 세계 4위로 60만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경제력도 월맹보다 월등히 앞섰다. 그러나 정부가 무능하고 부정부패가 만연했으며 휴전후 사이공에는 100여개의 좌파단체, 시민단체, 통일 운동단체와 좌파언론사들이 “전쟁은 민족간 내전이다. 미국등 외세가 내정간섭을 하지 말라!” 외치면서 5만명의 간첩들이 득실거리면서 부폐척결, 민족주의, 평화주의, 인도주의를 위장해 시민사회에 파고들어 반미, 반전, 평화주의를 부르짖게 되자 결국 미군이 철수하고 한국군도 따라서 철수했다. 그 후 공산월맹은 2년후 사이공을 함락시키고 베트남은 적화통일되었다. 이 시나리오를 한국에서도 입증하기 위하여 공산분자들은 지금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67년간 동안 계속하고 있다.

  서독은 월남과는 달리 정부가 청렴하고 유능했으며 국민들이 이성과 법치를 중시했다. 서독국민들은 나치즘의 광장민주주의의 폐해를 경험한 국민들로서 이성을 갖고 행동했으며 정부는 법치를 중시하며 조작, 선동언론은 살아남지 못하고 위헌정당은 해산되고 초법적인 언동은 철퇴를 맞았다. 그러나 동독국가보안부의 슈타지(Stasi)의 공작도 끈질겼다. 슈타지의 지령을 받은 고정간첩 기욤(Günter Guillaume)이 브란트 총리의 비서가 되어 총리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휴가까지 동행하는 측근이 되었다. 그런데 서독 연방정보국(BND)이 슈타지가 보내는 단파지령을 탐색하여 기욤의 행각을 1년이상 추적해 확증을 얻고나서 전격적으로 채포해 버린다. 이렇게 되니 동독간첩을 비서로 채용하고 국정농단을 일으킨 책임을 지고 브란트 총리는 즉각 사임하였다. 서독 총리는 연방하원에서 재적과반수의 득표로 선출한다. 그런데 우리는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선출한다. 


  직접선출한 대통령인 국가의 통수권자를 탄핵하는 데에는 더욱 더 신중하게 접근했어야 했다. 더군다나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이며 적화통일의 야욕으로 광분하고 있는 북한공산정권의 만행이 날로 더 악랄하게 진행되고 있는 이 시국에 촛불민심으로 위장하고 광장혁명을 부르짓는 난동자들에 의해 주도된 탄핵정국을 자초한 것은 참으로 희귀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서독의 BND와 같이 인내심을 갖고 기욤의 행적을 확인한 것처럼 우리도 최순실의 국정농단을 은밀하게 추적 확인하고 확증을 제시하였다면 박근혜대통령도 즉각 사표를 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확인되지도 않은 언론보도와 광장시위를 핑계삼아 대통령탄핵을 미리결정하고 국정중단을 자초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소위 정치지도자들이라 자처하는 자들이 이런 일을 기다렸다는 듯이 촛불 들고 함께 광장에 나와 날 뛰고 국회에서 고함지르면서 촛불혁명의 영웅으로 추앙받으려고 앞을 다투어 과시하는 모습들이 국민들 눈에 다 비춰지고 있다. 국민들을 우습게보고 있는 발로(發露)다. 월남정부의 어리섞음은 버리고 서독정부의 현명함을 취하는 대신 오히려 그 역을 취하는 어리섞음을 스스로 취한 행동이었다.  마치 적화통일을 획책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시나리오에 따라 춤추는 꼴뚜기 노릇을 자청한 셈이 되어버렸다.


우리국민들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대통령을 잘 못 보필하고 최순실이 날 뛰도록 방치한 국정 수행책임자들에게 먼저 책임을 묻고 싶다. 국민들이 직접 뽑은 국가통수권자의 권위가 실추되지 않도록 보좌하는 것이 전 공직자의 기본적인 책무다. 통치자는 民無信(민무신)이면 不立(불입)이기 때문이다. 통치자의 권위와 신뢰도는 국력을 일으키는 원동력이며 발판이기 때문이다. 대통령 탄핵정국으로 인해 우리 국민들은 얼마나 실망감에 빠졌으며 800백만 해외동포들은 얼마나 당혹스러웠으며 우리를 도와준 63개국 국민들은 얼마나 허탈했겠으며 기업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맥이 빠졌겠으며 국가적 손실은 얼마며 국격은 얼마나 깊숙이 땅에 떨어졌는지 보이지가 않게 되었다. 정유라를 위해 말 사주고 경기장 만들어 준 값의 수만 배 수천만 배가 넘는 국가적 손실은 누가 감당할 것인지? 이를 보고 제일 고소하게 여길 집단도 뻔하다. 김정은 일당, 일본, 중국, 소련 등 6.25 전쟁을 일으킨 원흉들이다.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기본이 있다. 그것은 자연법칙이며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사회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인륜도덕이 법보다 먼저 존재한다. 현대생활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기본은 바로 아비를, 스승을, 임금을 바로 섬기는 것이다. 아비가 잘 못 했다고 해서 ‘아버지 그만두고 내려오시오’ 하지 못한다. 자식이 아비를, 제자가 스승을, 신하가 임금을 심판하고 처벌하게 되면 그 집안은 그 사회는 그 나라는 더 이상 존립돨 수 없다. 시스템을 받처주는 질서가 무너지면 시스템은 곧 무너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번에 한 짓들은 우리사회가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질서를 무시한 방자한 난동자의 행동이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로 놓은 것이다. 최순실의 국정농단을 핑계로 우리사회의 기본 질서를 뒤 흔들어 놓은 난동 자들의 농단(壟斷)이다.


   이번 1월 27일 아시아와 유럽을 이을 세계 최대의 터키의 다르다넬(Dardanelles)해협을 가로지르는 세계최장 현수교 건설공사 수주경쟁에서 한국의 대립산업과 SK 건설이 일본 컨소시엄을 제치고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었다. 이번공사는 일본 이토추와  IHI컨소시엄과 치열한 경쟁 끝에 쟁취한 승리로서 총 공사비 3조 3600원대 수주전쟁이었다. 그런데 이 공사를 따내기 위해서 일본 아베 총리가 직접 총 지휘하고 국토교통상이 일 주일 전까지 상주하면서 지원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대통령은 탄핵상태로 청와대에 구금되어 있고 SK를 비롯한 재벌기업 총수들은 국회에 불려나와 범죄자 신분으로 심문당하고 해외출장도 금지된 상태이었으니 우리 기업인들은 얼마나 어려운 여건에서 수주전쟁을 치렀을지 짐작이 간다. 이번 대통령 탄핵정국으로 인해 기업의 수주활동은 물론 통상, 교역, 문화 등 각 분야에서 입을 타격과 국가적 손실이 엄청난 결과로 되돌아 올 것이 뻔하다.


  딸자식을  시집보낼 때 다섯 가지를 가려서 보내라(女有五不取)고 공자가 말했다. 즉 집안을 거역한자(逆家子), 집안을 어지럽힌 자(亂家子), 죄지은 집안(世有刑人), 대대로 몹쓸 병이 있는 집안(世有惡疾), 아비가 없는 집안(喪父長子)의 아들과는 결혼시키지 말라고 했다. 나라의 통치자를 촛불민심으로 밀어붙이고 통치력을 박탈해 버리는 것은 바로 반역이다. 집안으로 말하면 애비를 내친 집안 꼴이니 이 다섯 가지가 다 해당된다. 맹자도 말했다. 未有仁而 遺其親者, 未有義而 後其君者焉(미유인이 유기친자,미유의이 후기군자언)이라 했다. 자식 된 자는 그의 부모를 버리지 못하고 의(義)로운 자는 그가 섬기는 임금을 뒤로 하지 않는다고 했다. 자기가 섬기는 지도자를 배반한자가 의로운 자가 될 수 없다. 박대통령의 탄핵을 지켜주어야 할  의원들이 그 대통령을 버리고 나가 만든 당이 ‘바른정당’, ‘義로운 정당’ 이라고 하니 참으로 가관이다. 우리도 지도자를 뽑을 때 이 같은 다섯가지 역행자들을 가려서 뽑아야 한다(民有五逆不取). 어리석은 군중들은 ‘겉만 보고는 그 속내를 알 수 없음으로 간사한 사람이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어도 뉘우쳐서 바뀌게 할 수가 없다 (視其外而信其中 故有奸人亂國而不可悔者也, 시기외이신기중 고유간인난국이불가회자야)‘ 라고 인조때 장유(張維, 1587-1638)가 겉 다르고 속 다른 그 당시 우리 내 사대부들을 보면서 탄식한 말이다. 지금 우리가 이 같은 어리석음을 똑 같이 되풀이 하고 있다.


    우리들은 우리가 섬기는 지도자의 불의를 보면 목숨을 걸고 간해서 불의를 막아야 할 책무가 또한 우리 모두에게 있을 뿐이다. 우리사회가 불의가 용납되고 끼리끼리만 차지해서 나누고 仁義를 가장하여 국민을 현혹하는 일을 결단코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故當不義 臣不可以弗爭於君(고당불의 신불가이불쟁어군), ‘불의를 보면 신하는 임금에게 간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했다. 신하된 자는 목숨을 걸고 먼저 간 하라고 했다. 간해보지도 않고 ‘때는 이때다!’ 하고 임금을 곧 바로 벌하겠다고 덤벼드는 것은 국록을 먹는 신하도 백성도 아니다. 이는 곧 反逆이다. 자기의 임금을 배반한 자는 언제든지 배반할 수 있는 자들임으로 외국기업인들이 우리들과는 수주나 거래나 자유무역협정(FTA)도 맺을 수 없다고 돌아선다면 우리는 뭐라고 답해야 할 것인가?


   우리가 지금까지 피땀 흘려 쌓아놓은 소중한 가치들이 한 순간 물거품으로 변하고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가 있다. 우리는 지금 매우 위태로운 징검다리위에 서 있다. 우리는 서둘러서 이 다리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Out or Die!


Feb 21, 2017 

Dongree w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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