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한복음 15:13

 

 

               한국인 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윌리엄 해밀턴 쇼

                       (서위렴) 대위   

 

    Capt. William Hamilton Shaw(II)                                                                               img7.gif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빌 쇼)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 윌리엄 얼 쇼와 애드린 해밀턴 쇼의 아들로 1922년 6월 5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빌은 그의 두자매 메리 제인과 로버타와 함께 평양에서 자랐다. 그는 평양 외국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39년 미국 델라웨어에 있는 웨슬리언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일본의 한국지배가 한창인 1941년  한국에 있는 외국 선교사 추방령이 발동되어 모든 선교사들이 추방됨에 따라 그의 부모와 자매들도 오하이오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1943년 웨슬리안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동창생인 주아니타 로빈손 양과 결혼했다. 결혼 후 해군에 입대하여 장교 훈련과정을 마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유럽지역에서 PT함 전투수행장교로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그의 PT함 수행장교로 복무한 내용은 유일한 생존 승무원인 케니스 캄벨의 웹사이트 ( The Story of PT-518.) 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Photo 1.  1944년 8월 PT518 함상에서 승무원과 함께한 사진. 앞줄 왼쪽에서 첫번째가 윌리엄 해밀턴 쇼 소위.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윌리엄 해밀턴 쇼는 부인 주아니타와 큰 아들 로빈손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 온다. 그는 미해군청의 임명을 받아 진해에 있는 대한민국 해군사관학교 설립을 지원하였으며 해군사관학교의 조교로 근무하였다. 1949년 10월 그의 둘째 아들 스테펀이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빌과 그의 가족은 다시 미국에 돌아왔다. 그는 하바드대학에서

동아시아와 한국에 대한 연구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선교사의 자격으로 다시 한국에 돌아 올 목적으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는중에 한국에서 1950년 전쟁이 발발하였다.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받자  그는 그의 부인과 두 아들에 대한 책임감과 학위를 끝내야겠다는 열망으로 갈등을 겪고 있었지만, 빌 쇼는 미국과 함께 한국을 그의 고국으로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하였었다. 그는 결국 그의 결심을 적은 편지를 한국에 있는 부모님께 보내게 된다.

 

아버님 어머님!  소자는 지금 한국국민이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피흘리고 있는데 이를 먼저 돕지 않고 외면한체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평화시에 한국에 선교사로 돌아간다는 것은 제 양심이 도저히 허락되지 않습니다. 이 자식의 결심을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빌은 곧 미 해군에 복귀하여 한국전에 참전하게 된다. 빌은 한국어와 한국지리에 능통했기 때문에 곧 바로 맥아더 장군의 최측근 참모로 임명되었다. 빌은 대한국민국 해사 창설자이며 해안경비 훈련을 위하여 해사생도와 함께 한국해안 경비 순찰훈련을 담당한 당사자로서 한국해안사정에 정통해 있었기 때문에 멕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수행에 최측근 참모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더욱이 빌 쇼는 세계 제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노르만디 상륙작전의 전쟁주역이었으며 연합군 사령관인 아이젠아우어 장군을  PT518함을 직접 조정하여 상륙시켰던 역전의 용사이었다.1950년 9월 15일을  기하여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이 수행된후 빌 쇼는 서울 탈환을 목표로 전진하는 미 해병대의 정보장교로 배속되어 미 해병 5연대 3대대와 함께  전진하면서  해병 7연대 진격과 북한군 퇴로를 압박하려는 목적으로 서울의 서북방지역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그가 순찰대를 이끌고 녹번리 지역에 진입하는 순간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북한공산군의 매복조의 습격을 받아 1950년 9월 22일 한국땅을 밟은지 7일만에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Photo 2.  1944년 6월 24일 노르만디 상륙작전 D+18일 PT518 함에  아이젠 하우어 장군 커크제독등 연합군 VIP를 태우고  윌리엄 해밀턴 쇼 소위가 직접운전하여 노르만디 해안에 상륙시키고 있다. 이 사진 아랫편에 아이젠 하우어의 친필 사인이 표시되어 있었다.

 

    

 

      

나중에 그 위치기 옮겨지기는 했지만 그의 전사를 기념하려는 한국친구들, 백낙준 박사를 비롯한 42명과 9개의 단체에서 그가 전사한 그 자리에 전사기념비가 세워젔다. 인천상륙 작전이 수행되기 하루전 1950년 9월 14일 빌은 함상에서 그의 부모에게 편지를 쓴다.

 

아버님 어머님 지금 상황을 말 할수 는 없지만 주님께서는 내가 한국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내가 이곳에 와 있기를 원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윌리엄 얼 쇼 선교사의  외아들인 윌리엄 해밀턴 쇼가 전사하자 그의 친구와 가족들이 한국친구들을 위해 그의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기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 기금으로 1956년 12월 목산언덕에 기념채플이 건립되고 1957년 부활절에 헌당식을 가젔다. 윌리엄 얼 쇼 선교사는 이 채플건립기금을 위해 5955명 이상이 14,500 달러를 기증했다고 보고했다.아래 그림은 목산언덕에 처음 건립 건립될 당시의 채플모습이다. 목원대학교회는 이 채플에서 1978년 9월 24일 최초로  예배를 가졌다. 목원대학교회는 현재의 채플에서 일반인 성도를 위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채플 입구에는 윌리엄 해밀턴 쇼의 사진과 요한복음 15:13이 세긴 동판이 건립되어 있었다.

: Greater love has no one than this, that he lay down his life for his friends. John 15:13.

 

                   

                          Photo 3. 1956년 12월 목산언덕에 건립된 윌리엄 해밀턴 쇼 기념채플이 건립되고 헌당식은 1957년 부활절에 거행되었다. 1988년 화제로 소실될때까지 계단과 종탑부분이 개조되었을 뿐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된것을 1988년 다음 사진을 보면 짐작 할 수 있다.

 

         

 

윌리엄 얼 쇼 선교사는  기념채플을 건립하여 헌납했을 뿐만 아니라 쉐퍼드 부인으로 부터 기증받은 6,000 달러의 기부금으로 감리교 목사를 위한 수양관 목자관을 건립하여 감리교 대전 신학원 (후에 목원대학) 에 헌납하였다. 본래 건립된 목산기념채플은 1988년 화제로 소실됨으로 목원대학에서는 그 자리에 본래의 모습 그데로 재건축하였다. 감리교 대전신학원은 후에 감리교 대전신학대학이 되었으며 현재는 명문 사학 목원대학교가 되었다.  기념채플은 목원대학교 학생들의 신앙의 요람이 되었는데, 이는 1950년 한국의 친구를 위하여 희생한 윌리엄 해밀턴 쇼의 희생과 사랑이 신앙적 유산이 된것이다. 한국전쟁후 쇼 선교사 부부는 대전에 살았으며  쇼 선교사는 감리교 대전신학원의 교수로 봉직하였으며 부인 에드린 여사는 1962년 40년간의 감리교 선교사 임무를 마치고 은퇴 할 때 까지 전쟁미망인 구재사업을 하면서 한국사회에 봉사하였다.

 

 

                   

 

 Photo4. 1986년 12월 예배를 끝내고 대학교회 전교인 사진. 이 사진은 1956년 채플이 건축된당시의 그대로이며 '목산 기념 예배당' 간판이 분명하다. 이 채플 입구 좌측에 윌리암 해밀턴 쇼 대위의 사진과 요한복음 15:23을 새긴 기념동판이 건립되어 있었다. 스테펀.R. 쇼도 자기 형과 함께 할아버지를 따라 이 교회에 자주 찾았다고 전해왔다.

 

 

 

            

윌리엄 해밀턴 쇼의 미망인 주아니타 로빈손 쇼는 1956년 두 아들을 데리고 다시 한국에 돌아와 감리교 선교사의 자격으로 12년간 서울에서 한국인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그녀는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여 한국어에 능통하게 되자 서울 외국인 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그녀는 다시 미국에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여 1963년 케이스 웨스턴 대학에서 사회사업(MSW)석사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에 돌아와 이화여대에서 사회사업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세브란스 대학에 의료사회사업과를 신설하여 활동함으로서 의료봉사와 사회복지 사업을 통하여  한국인들을  돕는데 헌신하였다. 그 녀는 1968년 은퇴하여 한국을 떠나 지금은 미국 오하이오에 거주하고 있다.

 

 

                             

 

Photo 5.  1949년 서울에서 쇼가족 사진. 왼쪽으로 부터 쇼 선교사 ,주아니타 , 로빈손, 해밀턴, 에드린. 둘째 아들 스테펀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1949년 어느 봄날  빌 가족의 기념일에 찍은 사진으로 추측된다. 이 사진이 가족과 찍은 마지막 사진인것으로 보인다.

 

     

 윌리엄 해밀턴 쇼의 큰 아들 윌리엄 로빈손 쇼는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해인 1950년에 자기 아버지가 시작했던 학위논문 연구과제인 '동아시아 역사와 언어'로 하버드 대학에서 역시 아버지의 지도교수였던 에드윈 라이샤워 교수의  지도로 1977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도 한국어와 한국문화에 대하여 정통하였으며 플브라이트와 덴포스 장학재단을 통하여  아시아와 한국인을 지원하는데 기여하였으며 1981-1982년에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서' 한국 법률의 역사'로 강의를 맡기도 하였다. 그는 또 한국과 관련된 두권의 저서를 펴 내기도 하였는데 그 하나는 " 유교국가에서 법률적인 규범"(1981, 버클리대) 이고 또 하나는 " 한국에서 인권" (1991,하바드대)이다. 그는 1993년 심장질환으로 사망하였다. 그런데 그의 미망인 케롤 카메론 쇼 여사는 미국의 저명한 역사학자로 많은 논문과 저서를 냈는데 특히 서울대학교 출판부에서 발간한 ' 외국의 한국독립의 파괴행위(The foreign destruction of Korean independence)'는 한국의 근대사 연구를 위하여 매우 귀중한 자료로 국내 학계의 많은 관심을  갖게한 저서다. 그녀는 소녀시절  한남대학교 수학과 교수로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1959년 한국에 와서 대전에서 어린시절을 보냈으며 대전에서 살고 있는  쇼 대위의 가족과 자연스럽게 만나 쇼 대위의 큰 아들과 결혼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쇼대위의 막내아들인 스테펀은 1949년 10월에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1967년 서울외국인 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현재 미국 오하이오에 살고 있으며 오하오 주 법원판사로 재직하고 있다. 여기 이 일대기가  전적으로 그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완성된 것이다.

 

부기

 

 부기 #1. 윌리엄 해밀턴 쇼와 그의 부모 윌리엄 얼 쇼와 에드린 해밀턴 쇼의 묘가 서울의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있음을 일대기 제작진이 확인하였다.

 

부기 #2. 좀더 자세한 윌리엄 해밀턴 쇼의 생애와 한국인 친구를 위하여 헌신한 선교사들과 외국인들의 삶에 대해서는 " Their War for Korea" (Allan R. Millett 저)를 참고하면 된다. 또한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의 해군복무시   PT518함 근무당시의 정황과 사진자료들을 PT518함 최후의 생존자인 케니스 캠밸이 운용하는   " The Story of PT-518"  사이트를 참고하기 바란다.

 

부기#3. 쇼대위의 미망인 주아니타 로빈손 쇼와 그의 막내아들 스테펀 로빈손 쇼는 목원대학교회 성도님들에게 깊은 감사와 애정을 보냅니다. 특히 목원대학교의 윤희중 교수님의 격별한 사랑과 노력으로 한국에서 쇼가족을 명예롭게하는 웹사이트를 만들어 준데 대하여 감사 드립니다.  

 

 

편집노트

 

♠  대학교회 홈페이지에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의 일대기를 제작하고 출판하는 과정에서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의 막내 아드님이신 윌리엄 로빈손  쇼가 그의 가족의 한국에서의 이야기와 여러 가지 사실들을 확인하고 바로잡아 준데 대하여 목원대학 교회 성도들을 대표하여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이다.

 

♠ 본래 목산 채플입구에 건립되었던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의 사진이 새겨진 기념명판이 1988년 불의의 화제로 소실되고 망실된데 대하여 우리 대학교회 성도들은 너무나 안타갑게 여기고 쇼 가족에게는 유일한 위안이며 추억이 깃든 그 기념채플마저 소실되고 더욱이

그 자리마저 찾을수 없게 고층 아파트 숲으로 변모해 버린 현실이 너무나 안타가울 뿐이며 우리에게 너무나도 고귀한 사랑을 주고 희생한 윌리엄 해밀턴 쇼에 대한 한국인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기념명판이라도 다시 찾는다면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 것 같아 교회와 교목실에서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아직까지 찾지 못하고 있어 더욱 안타가울 뿐이다.

 

♠  쇼대위와 그의 부모님들의 묘비는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안장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윌리엄 얼 쇼 선교사와 에드린 해밀턴 쇼는  F-7,8 구역에 안장 되어 있으며 같은 블록 앞줄 F-5구역에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가 묘비와 함께 안장되어 있다. F-6 구역은 주아니타 로빈손 쇼 미망인을 위한 묘역으로 예비되어 있었다. 쇼 대위는 한국에서 출생하여 한국에서 자랐으며 한국인 친구를 위하여 싸우다가 한국땅에서 짧은 생애를 마감하고 또한 한국의 어려운 사람을 위하여 평생을 바친 그의 보모와 나란히 이 땅에 잠들고 있다. 이미 본문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의 전사지점에 세운 전사기념비는 백낙준 박사를 비롯한 42명의 한국인 친구들과 정동교회를 비록한 9개의 기관에서 협력하여 건립했으나 서울시 도시확장 과정에서 지금은 은평구 응암1동 85-41에 자리한 어린이 놀이터 구석으로 옮겨저 있으며 은평구에서 관리하고 있다. 목원대학교회 임원들이 2007년 11월 양화진과 응암동 전사비 일원을 참배하고 헌화함으로서 그가 가신지 58년만에 처음으로 그 의 희생을 기리는 때 늦은  위로나마  전할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 페이지 밑에 사진을 크릭하면 귀중한 사진을 볼 수 있다. 한가지 반가운 소식은 은평구에서는 해밀턴 쇼 대위의 죽음을 세계 자유애호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고 역사현장의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부지 2000평을 확보하고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 기념공원 사업'을 2008년에 시작하여 2009년도에 완성한다는 계획을  수립하고 서울시의 사업승인과 행자부와 국방부의 지원을 얻어 현재 진행중에 있다.



                          

  

  Photo 6.  2008년 4월 9일 은평구청에서 기념사업 설명을 듣고 윌리엄 해밀턴 쇼 기념공원이 건립될 지하철 6호선 역촌역 5거리에 위치한 현장에 안내 받은 일행. 좌로부터 안승병 목사, 필자, 해군동지회 김명삼 고문,최종식회장,건국회 임덕기 이사.

 

 

스테펀 R.쇼의 편지

 

From: "Shaw" <shaw@third.courts.state.oh.us>

  To: "Hee-Joong Yun" <heejy@mokwon.ac.kr>

  Sent: Thursday, January 17, 2008 4:33 AM

  Subject: William Hamilton Shaw Biography

 

존경하는 윤박사님, 오래 참고 기다려 주어서 감사합니다.  오늘 드디어 새로운 윌리엄 해밀턴 쇼의 일대기 초안을 보냅니다. 나는 이 초안이 당신의 맘에 들기를 바라며 이글을 읽게되는 모든 한국사람들이 관심을  갖게되기를 기원합니다. 나는 당신이 나한테 보낸 초안을 가능한 최대한 따르도록 노력했습니다. 이 일대기가 당신의 웹사이트를 아주 값진 웹사이트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저의 어머님과 저는 이러한 사이트를 만들려는 당신의 노력과 그렇게 오랜세월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에 있었을때의 우리 가족에 대한 일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후원하는 목원대학 교회 성도님 여러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감사의 표시를 꼭 이 사이트를 통하여 전할 수 있도록 부기 #3를 첨부할수 있게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 새로운  일대기 초안을 만드는 데 도울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준 당신에게 감사드립니다. 저의 어머님과 저는 이 웹사이트가 목원대학 교회의 일부가 된 것을 큰 명예로 생각합니다.  이 프로젝트에 대하여 제가 다른 도울일이 있으면 저에게 말해 주시기 바랍니다.

 

존경을 표하면서

스테반 로빈손 쇼

 

 

 

                                                                                                                      img7.gif

감사의 글

 

♠ 우리는 특별히 미국에 있는 윌리엄 해밀턴 쇼 가족의 근황과 빌 쇼에 대한 귀중한 자료들을 챙겨서 보내주신 남기철 전학장님과 마릴린 스톡스 부인께 감사드립니다.

 

♠ 우리는 우리가 영문으로 만든 윌리엄 해밀턴 쇼일대기 초안을 세심하게 읽어주시고 몇가지 오류를 지적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자료를 찾아 정확하게 검증해 주신 신학대학 김흥수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 목원대학교와 목원대학교회, 우리 목원가족은 녹번리에 있는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 전사비 보존과 정화에 헌신적으로 봉사해주신 대한민국 해군동지회 최종식 회장님과 역전의 해군동지 여러분에게 깊은 감사를 표시합니다. 또한  쇼 대위의 숭고한 희생을 전국민에게 알리고 자유수호를 위해 도왔던 전 세계 자유애호 국민들에게 자부심을 갖는 역사현장의 교육장으로 빛내기 위하여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 기념공원 사업'을 강력한 지도력으로 추진하고 계시는 은평구 노재동 구청장님과 관계관 여러분과 해군동지회 여러분들의 협력과 노력에 대하여  감사드리고 이 사업이 성공리에 완성되어 이 기념공원이 국민들로 부터 큰 사랑을 받는 날이 하루속히 찾아오기를 우리 목원가족과 쇼 가족모두는 주님께 간절히 간구하고 기도합니다.

* 위 내용은 다음 웹페이지에 있는 내용을 한글로 번역한 것으며 다음 주소에서 영문으로 된 WHSbiography를 바로 볼 수 있다.

 

http://church.mokwon.ac.kr/eng/WHSbiog081203.htm

http://home.mokwon.ac.kr/~heejy/WHSb081203.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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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ditional photos memorializing Bill Shaw


update 2008/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