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보다 한국인을 더 사랑한

           윌리엄 해밀턴 쇼대위를  말한다!                

               

 

                            <  53회현충일을 맞이하면서 >

 

   우리민족의 제2의 도약을 위하여 새롭게 출범한 새 정부의 막중한 국사를 책임지고 이끌어 가시며 국민들을 위해 불철주야 수고하시는 장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민족은 수많은 역경과 수난 속에서도 불사조처럼 다시 일어나 세계의 어느 민족도 감히 흉내 내지 못할 번영과 민주주의를 꽃피운 자랑스러운 민족으로서 긍지를 갖는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감격과 번영의 밑바닥에는 이 민족을 위하여 피 흘린 수많은 호국선열과 또한 지금 부모세대들의 아픔과 땀방울이 밑거름이 되어 오늘의 우리가 있게 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지금도 아물지 않은 상처 속에 전쟁의 아픔은 우리의 부담으로 남아 있습니다.

 

  마침 어제 미국 알링턴 국립묘지에서는 58년 전 한국전에서 전사한 잭 타이(Tye) 일병의 유해를 압록강 주변에서 발굴하여 안장하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54세의 동생 톰 타이가 형의 유해를 싼 성조기를 받으면서 ‘그 동안 부모님이 겪얶던 아픔은 말하고 싶지도 않다’ 고 했으며 ‘형과 같은 이들의 희생을 통해 한국의 자유가 지켜 젓고 한국이 발전할 수 있었음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그냥  지나쳐 버릴 수 없는 아픔이고 충격입니다. 오랜 세월 이 전쟁의 아픔을 가슴에 뭍고 숨져간 부모가 어찌 타이 일병의 부모님뿐일까요? 아직도 우리 땅에 묻혀 고향을 찾지 못하는 수많은 영혼들이 잠들고 있어서 호국의 달 6월을 맞이하면서 우리들의 책무가 막중하게 느껴지는 계절입니다. 

 

존경하는 장관님!

  小職은 오늘 58년 전 그 전쟁터에서 우리의 평화와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싸우다가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지점에서 장열하게 산화하고 양화진에  잠들고 있는 미 해군 대위 윌리엄 해밀턴 쇼(徐偉廉 2世)의 이야기를 전해 올리는 것을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도 다른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 땅의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태평양을 건너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젊은이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 전쟁에 참여한 동기나 사연은 전혀 다릅니다. 그는 1945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시 PT518 부함장으로서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의 한사람으로 임무를 마치고 해군중위로 제대한 사람입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났다해도 미국국민이며 제대한 군인이기 때문에 한국전쟁에 대한 하등의 의무도 책임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평양에 있는  선교사 서위렴 1세(William E. Shaw)의 아들로 1922년 6월 5일 평양에서 태어나고 고등학교까지 평양에서 마쳤습으로 한국어도 잘 했습니다. 미국에 가서 웨스리언 대학을 졸업하고 역시 목사님의 딸인  주아니타(Juanita Robinson)와 결혼하고 미 해군장교로 입대하여 복무하고 제대한 것입니다.

 

  미 해군에서 제대하고 난 후 부모님이 계신 한국에 와서 미 군정청 경제협력청(ECA)에 근무하다가 진해 해군사관학교 민간인 교관으로 근무하였습니다. 또 한국해안경비대 창설에도 기여하는 등 대한민국 태동기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그에게 배웠던 사관생도들이 현재 생존해 계신분도 계십니다. 그런데 공부를 더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 가족을 데리고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라이샤워 교수 밑에서 박사학위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이 남침하여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해밀턴 쇼는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가족에 대한 부담과 학위에 대한 미련과 부모가 계신 한국, 자기가 태어난 나라, 한국에서 가르쳤던 해군사관생도들 때문에 번민하는 가운데,  요한복음 15:13절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를 읽고 한국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가족들은 오하이오에 있는 주아니타 부모에게 맡기고 위싱톤으로 날아가 자원입대하였습니다. 그는 한국어와 한국지리, 한국해안 경비 상항에 정통한 관계로 미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최측근 보좌관으로서 해군정보장교로 임명되어 인천상륙작전 수행에 중대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1950년 9월 15일 새벽, 미명을 기해 맥아더 장군은 기함 맥킨리를 필두로 순양함, 구축함, 로켓포함을 이끌고 팔미도를 지나 월미도와 인천해안을 강타하면서 상륙작전을 개시하여 오전 6:55분 미해병 스미스 상사가 월미도 꼭대기 나뭇가지에 성조기를 붙들어 매는데 성공하고, 이어 오후 5:31분 해병대 디플라 소위가 인천에 첫발을 내딛는 것을 시작으로 밤새 상륙군이 인천해안에 상륙함으로서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이 이루어 진 것입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리에 완수되었음으로 해밀턴 쇼 대위의 임무는 끝난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 자원해서 미 해병대 5연대에 배속되어 서울탈환작전에 직접 참가하게 된 것입니다. 9월21일 저녁 5연대 3대대 1소대 윌리암손 중위의 판초에서 같이 밤을 새우고 9월 22일 아침, 미해병 7연대의 서울접근을 위한 적 후방 정찰을 목적으로 록번리에 접근하는 순간,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공산군의 매복조에 저격당하고 만 것입니다. 피아간의 총격은 2시간이나 계속되었으며 Item부대가 도착하여 적들을 제압하고 6명의 해병대 구조대가 길 위에 쓰러진 쇼 대위를 구조했을때는 온몸에 구멍이 수없이 열려있는 상태로 만신창이가 되어 의식이 없었습니다. 서울탈환을 일주일 앞두고 장렬하게 산화한 것입니다. 그는 서울탈환 후 양화진 묘지에 안장되어 우리 곁에 잠들고 있는지 올해로 58년입니다. 양화진 그의 묘비명에 요한복음 15:13, Greater love has no one than this, that he laydown his life for his friends. John 15:13 이 세겨저 있습니다. 그의 짧은 생애는 이렇게 녹번리 숲속에서 끝났습니다.

 

  쇼 대위의 전사를 안타깝게 여긴 친지와 단체들이 뜻을 모아 쇼 대위가 전사한 그 자리에 전사기념비를 1956년 9월 22일 건립하였습니다. 건립위원들은 백낙준, 정일권, 김활란, 리관숙, 김용우, 유형기, 김성진, 장용하등 우리나라의 훌륭한 지도자들이시고 해군참모총장, 해병대사령관, 이화, 배재, 연희, 정동감리교회, 광성, 세의 학교등 중요한 기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서울시의 확장과 도시계획으로 그 전사 비는 철수될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 은평구 응암1동 85-41번지 아파트 숲으로 둘러싸인 어린이 놀이터의 한쪽 구석에 옮겨져 오늘까지 우리 은평구에서 관리보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졸지에 외아들을 잃은 부친 쇼 선교사를 위로하고 해밀턴 쇼 대위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친구와 친지들이 미국의 고향과 교회에서 기금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 기금으로 1956년 5월 부활절 대전의 목산 언덕에 윌리엄 해밀턴 쇼 기념예배당이 준공 되었습니다. 그 예배당이 바로 목원대학 채플이며 현재는 목원대학교의 신앙적 요람이 된 것입니다. 당시 기념예배당 기금을 적어도 5,955명이 14,500 달러를 기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한 두 사람의 재력가가 기부금을 낸 것이 아니라 미국 교회의 많은 성도들과 고향친구들이 2달러 3 달러씩을 기부하고 토지와 물자를 기증한 한국인을 포함하여 6000명 이상이 기부한 것은 그 당시 쇼 대위의 전사소식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분명 우리의 동족은 아닙니다. 그는 미국 국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를 진정한 친구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 땅에서 태어나고 소년시절을 이 땅에서 보냈습니다. 대한민국 해안경비대 창설하는데 협력했으며 해사 조교를 하면서 젊은 생도들의 친구로 혹은 선배로서 우정을 쌓았습니다. 진해의 해사 사관생도들에게 인기가 제일 많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때 외국인 교관이 세 명 있었지만 오직 쇼가 2차 대전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PT518 함장으로 참여했던 역전의 용사일 뿐만 아니라 한국말과 일본어에 능통하고 유머도 곧 잘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과정의 연구과제도 ‘아시아의 역사와 문화’ 이었습니다. 그는 장차 한국의 선교사로 갈 것을 결심하고 모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바로 한 달 전에는 매사추세츠에 있는 작은 이스트 브레인트리(East Braintree)교회 목사로 임명받아 겨우 한 달 동안 사역하였는데 그의 셋째 주 설교제목이 “한국에서 감리교가 한 일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 다음 넷째 주 설교제목은 “한국은 감리교를 위해서 무었을 할 수 있는가?” 이 설교를 마지막으로 그는 그의 성도들과 가족을 뒤로하고 전쟁터 한국으로 달려왔던 것입니다.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번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의 부모님께 편지로 자기의 심경을 토로했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내가 지금 한국 국민이 전쟁 속에서 고통당하고 있는데 이를 먼저 돕지 않고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평화 시에 한국에 선교사로 간다는 것은 도저히 양심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신앙심이 투철한 쇼 선교사는 이런 아들을 어떻게 말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구차하게 난을 피하고 악착같이 승리를 취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臨難毋苟免 狠毋求勝입니다. 禮記 曲禮편에 있는 이야기 바로 그대로 입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앙에 따라 행동하는 학자이면서 군인이었으며 목사이었지만 그의 의식 속에는 동양 사상을 이해 할 수 있는 사회적 배경이 이미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한국인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한국인이 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한국을 미국과 똑 같이 자기의 조국이라고 생각했으며 아니 미국보다 오히려 한국을 더 사랑한 미국인이었습니다.

 

그가 1950년 9월 14일 인천을 향하는 함상에서 아버지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는 ’아버님! 우리는 지금 고향땅에 가까이 와 있습니다. 이 편지를 받게 될 때는 더 가까이 다가가 있을 것입니다 (We are near home and will be nearer before you get this). 한국을 자기가 태어난 고향 (home)이라고 썼습니다. 그의 결단은 지도자들의 노블리제 오블리제도 아니고 어떤 보상을 위해서 결단한 것은 더더구나 아닙니다. 우리를 진정한 친구로 생각하고 우리를 돕는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그의 의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가 이스트 브레인트리 교회에서 마지막 두 주일의 설교제목들을 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셋째 주 설교제목을  “한국에서 서위렴대위가 한 일이 무엇인가? ”  그리고 그 다음 주 설교제목을 또 “한국은 서위렴 대위를 위해서 무었을 할 수 있는가?” 이렇게 고쳐서 반문해 보면 우리가 이 시점에서 그를 위하여 할 일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게 합니다.

 

  먼저 쇼 대위 가족이야기를 간단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쇼 대위의 부친 윌리엄 얼 쇼(William Eearl Shaw(서위렴I세))선교사는 아들의 전사소식을 듣고 부산에서 달려와 참혹한 아들의 시신을 직접 목격하고 돌아서야 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는 그의 아픔을 대전에서 아들의 기념교회를 건립하고 목원신학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하면서 신앙적으로 이겨냈을 것입니다.  필리핀, 한국에서 40년 동안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1961년 은퇴하고 1967년 10월 5일 스텐포드 병원에서 별세하였습니다. 유해는 그의 유언에 따라 아들이 묻혀 있는 양화진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는 우리나라에 군목제도를 처음 도입하게 한 선교사였습니다. 부인 아델린 해밀턴 쇼(Adelin Hamilton Shaw)는 1919년 7월2일 서위렴 1세와 결혼하여 남편과 함께 선교사, 교사로 평양과 서울 대전에서 활동하면서 1971년 5월 8일 캘리포니아에서 별세하여 역시 양화진에 있는 남편과 아들 옆에 안장되었습니다.

 

  쇼 대위의 부인 주아니타(Juanita Robinson Shaw)는 1956년 두 아들을 데리고 서울로 다시 돌아와 외국인 학교 교사로 봉사하면서 1963년에는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세브란스병원에 의료사회봉사과를 신설하여 사회봉사 활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주아니타 여사에게 충무훈장을, 미국정부는 은성훈장을 추서하였습니다. 1968년 한국을 떠나 지금은 공직에서 은퇴하고 오하이오에 살고 있습니다.

 

      쇼 대위의 큰 아들 윌리엄 로빈손 쇼(William Robinson Shaw)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하버드에서 라이샤워 교수 밑에서 ‘아시아 역사와 언어’로 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에는 풀브라이트와 덴포스 장학재단 책임자로 1981-1982년에 근무하였으며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초빙 교수로 재직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유교국가에서 법의 기준’과 ‘한국의 인권’ 이라는 저서를 내었습니다. 1993년 심장질환으로 별세했습니다. 로빈손 쇼의 미망인 캐롤 쇼( Carole Cameron Shaw)는 저명한 미국의 작가로서 많은 논문과 저서를 남겼는데, 특히 1999년에 워싱톤에 있는 한국대사관 기록보관소의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국내 학자들은 접근 할 수 없는 중요한 자료들을 토대로 한국의 근대사 연구에 매우 소중한 저서 ‘The Foreign Destruction of Korea Independence'를 서울대 출판부에서 영문으로 출판하여 학계의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쇼 대위의 둘째 아들 스테반 쇼(Stephen R. Shaw)는 1949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1967년 서울외국인 학교를 졸업할 때 까지 한국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현재 Ohio 주 법원판사로 재직하고 있어 모친 주아니타 여사를 가까이에서 돕고 있습니다. 로빈손과 캐롤의 큰딸 줄리는 1990-1991년 오산의 공군기지에서 장교로 근무하였고 캐롤과 아들 데이비트는 1995년 서울에 살았으며 Yonsei Medical School의 편집자로 근무하였습니다.

 

      이렇듯 쇼 가족들 모두는 쇼 대위 못지않게 한결같이 한국을 사랑하고 잊지 않았습니다.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친구들을 위하여 무슨 형태로든지 각자의 처지에서 도움이 되는 일을 찾아 봉사하고 한국을 도우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부전자전 부전손전으로 쇼 가족이 3대를 걸쳐서 한국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지구편 어디에 있더라도 한국을 돕는 일을 생각하고 있을 그 들입니다. 양화진에는 이미 주아니타 여사의 묘역(Section F-5)이 남편 쇼 대위(F-6)옆에 예약되어 있습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하던 헐버트 목사처럼 한국인의 품성과 기질까지도 사랑한 그 들 이었습니다. 그 들은 고향땅인 한국에 묻히기를 원하고 또한 그렇게 우리 곁에 잠들어 있습니다. 해밀턴 쇼는 우리가 위험에 처할 때 바로 결심을 하고 우리 곁으로 달려와 목숨을 바쳐서 우리를 도왔으며 우리를 친구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친구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반응은 어떠한가요?

오직 그 가족들의 유일한 위안이며 추억인 목산언덕의 기념채플은 화제로 소실되어 없어져 버리고 대신 그 자리에 고층아파트가 들어서서 그 기념채플이 서있던 자리마저 찾을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전사지점에 세운 전사기념비 마저 팽창하는 서울시 확장계획에 따라 옮겨질 수밖에 없었으며, 현재는 아파트 숲에 둘러싸인 어린이 놀이터 한쪽 구석에 고적하게 서 있기 때문에 찾는 이 보는 이 없이 망각 속으로 뭍혀버리는 과거지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마침 20년 이상 이 동내에 살았다는 70대의 어르신 한분은 그 비가 무엇인지 한 번도 눈여겨 본 일도 없고 가까이 다가가 본 일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다가가서 본 묘비명에 ’ 아 장하시고 용감하시고 한국을 자기나라처럼 사랑하시던 천사여 길이 하나님 품안에 잠드소서. 우리 그대의 아름다운 마음 알어 널리 전하리‘ 이렇게 끝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가 목숨을 바쳤던 한국인 친구들은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지 자문해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대의 마지막 설교제목을 “한국친구들은 서위렴 대위를 위해서 무었을 했는가?” 이렇게 고쳐서 반문해 보면 우리는 우리의 친구를 위해서 한 일이 너무나 없습니다. 오히려 친구 되기를 거절하고 망각을 가장하고 외면한 채 오늘도 그가 피 흘려 쓰러진 그 땅을 무심히 밟고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반세기를 넘게 친구를 외면하고 지내는 것은 친구의 도리가 아닙니다. 예의와 절도를 숭상하는 국민의 도리가 아닙니다.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성공한 나라의 국민이 취할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존경하는 장관님!

동생 톰 타이의 볼멘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어렵다는 핑계로 우리의 진정한 친구들을 잊고 살아왔습니다. 염치없는 국민이 다되었습니다. 수백 년 간직해온 역사유적도 가책 없이 불살라 버리는 민족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나아가면 누가 친구 된다고 했느냐 하며 삿대질을 할 것 같은 상황으로 국민정서가 메말라 가고 있습니다.

 

  이제 

녹번리 골자기에 끝나는 쇼 대위의 위대한 사랑의 파노라마는 백련산 계곡을 역사의 향기로 뒤 덮게 하고 은평구를 평화를 지키는 도시로, 수도서울이 지구촌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품격 높은 도시로 거듭나게 하는 위대한 정신적, 신앙적, 역사적 유산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귀중한 자산이 될 수 있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쇼 대위는 2차 대전과 한국전쟁의 전쟁 영웅이었습니다. 비록 초급장교 이었지만 1944-45년 2년간 영국해협에서 PT518함장으로서 1944년 6월 6일 역사적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여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1944년 6월 24일 엽합군 사령관인 아이젠하우어 대장을 직접 PT518함을 운전하여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시키기도 했습니다(사진). 1950년 9월15일의 역사적 인천상륙작전시 맥아더 장군의 최측근 참모로서 한국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 이였고, 9월 22일 역사적인 수도 서울 탈환작전을 수행하다가 녹번리, 지금 우리가 밟고 섯는 여기에서 전사했습니다. 이만큼 역동적인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그의 가족은 이 민족의 암울한 시대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 땅에 전하고 무지한 우리민족이 개화하고 새로운 지식을 얻게 하는데 종교와 교육과 저서를 통해 한국인을 사랑하였고,  그의 희생으로 기념채플이 세워지고 한 대학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 때문에 미국의 수많은 교인들의 심령을 감동시키고 그리스도의 계명을 이렇게 분명하게 몸소 실천해 보인 신앙인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백련산이 바라보는 녹번리 숲길은 위대한 사랑이 승화된 바로 그 현장입니다.

  약삭빠르게, 억척스럽게, 성공하는 삶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대는 미국인이면서 한국을 더 사랑했습니다. 이미 미국에서 제대한 사람이 친구를 돕기 위하여 우리들의 전쟁터로 달려와 우리 땅을 밟은 지 딱 일주 일만에 우리 동족(어쩌면 평양에서 친구이었을 지도 모르는 그런 나이의 동족한테)한테 처참하게 희생되었습니다.

 

  한국에 전쟁이 낫다고 할 때 특별히 누구를 위해서라기보다 청년기를 한국에서 자란 그로서는 우리민족이 남이라고 딱 잡아 뗄 수 없는 입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완수되었다 해도 목표는 서울탈환임으로 그는 해군이니까 육지의 전쟁까지 걱정할 것 없다고 주저앉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해병대 몫이다 하고 뒷짐을 지고 물러나 있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결국 미해병 5연대를 따라 호레이쇼와 친구가 되어 한강을 도하하고 안산고지를 향하여 전진하고 있었습니다.

 

  9월 21일 저녁에 윌리암손 중위와 같은 판초에서 잠을 자고 나서 친구가 되었습니다. 숲에서 기다리고 있던 적의 총탄에 빌 쇼가 쓸어졌습니다. 쓸어져 있는 쇼를 끌어오기 위해 6명의 해병대가 구조대를 편성하고 끌어오다가 2명의 친구가 또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친구의 전사 소식을 들은 친구들과 친지들 6,000명이 기부금을 내고 물자를 보내와 기념예배당을 세우고, 또 친구의 죽음을 기리기 위하여 친구들 43명이 이곳에 전사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고비마다 친구들은 용감했습니다. 친구를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안했습니다. 전쟁은 비참한 것이지만 보석같이 빛나는 친구의 우정이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이런 친구들이 없다면 정말로 살맛이 안 나는 세상입니다. 윌리엄 해밀턴 쇼 친구들이 엮어내는 위대한 사랑의 대 파노라마가 여기 녹번리 골짜기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린 것입니다. 이 보다 더 진실 되고 감동적인 친구들 이야기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께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존경하는 장관님

  은평구에서는 일찍부터 그늘 속에 가려져 있어 햇빛을 보지 못하던 해밀턴 쇼 대위의 고귀한 희생이 햇빛을 보고 그 진가가 제대로 평가되고 국민적 사랑을 받아야 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간 기념비 건립위원과 해군동지회 지도자 여러분, 또 학계, 종교계, 혹은 실향민들과의 폭넓은 대화를 통하여 해밀턴 쇼 대위의 희생정신을 선양하는 사업이 조속히 추진되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30분이면 아직도 민족 분단의 현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지금 국가의식을 고취하고 국민정서 순화를 위해서 이 사업을 조속히 추진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업을 통하여 해밀턴 쇼 대위의 순수한 한국사랑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재평가하여 국민들과의 사랑의 공감대를 형성하려 합니다. 그의 희생을 통하여 대한민국의 자유가 지켜지고 민주주의 꽃이 활짝 필수 있었음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나아가 동양과 서양, 기독교와 유교를 이해하는 통로를 만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한국전쟁의 역사적 현장을 쇼 대위의 행적을 통하여 이해케 함으로서 은평구가 전 세계 자유 수호 평화애호인이 공감하고 자부심을 갖게 하는 품격 높은 서울의 역사현장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 할 것입니다.

 

존경하는 장관님

우리가 이 사업을 통하여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함께 아름다운 이야기로 얽힌 매력 있는 도시로 거듭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시고 지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08.5.26

  은평구청장 

  대한민국 해군 중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