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민족의 아픔과 함께 한

                    윌리엄 얼 쇼(William Earl Shaw)선교사 >>



윌리엄 얼 쇼 (徐煒廉)선교사

1890.8~1970.10(양화진 F-7)

양화진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양화진은 송파진, 한강진과 함께 서울로 들어오는 나루터일 뿐만 아니라 외침과 민란에 대비하여 상비군이 주둔해 있던 수도방위를 위한 중요한 군사기지였다. 지금은 절두산과 외국인 선교사 묘지가 있는 성지로 더 알려지고 있다. 특히 양화진 선교사 묘지공원은 벌써 일세기 전 우리민족이 영적 무지함으로 어둠의 그늘아래 눌려 고통을 당 할 때 이 땅에 그리스도의 복음과 함께 개화의 초석을 놓은 선구자들 555인이 말없이 누어있는 곳이다.  이곳은 이제 한국 기독교의 성지요 신앙의 고향이 되었다. 그들 모두가 우리 민족과 우리의 강토까지도 자기의 조국보다도 더 사랑했던 민족의 은인들이었으며 그 들 자손들 까지도 한국을 사랑하게 한 선각자 들이었다. 모두가 우리 민족을 미개한 민족이라고 하면서 거짓말 잘하고 정의감이 없으며 공공의식과 위생관념이란 도무지 갖고 있지 못하는 민족으로 단정하고 멸시했던 시절에,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선교사는 1906년에 발간한 대한제국의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에서

  

  “한국인은 합리적인 기질과 감정이 가장 알맞게 조화되어 있으며 평온 속에서 냉정을 잃지 않을 줄 알고 또 한 격노할 줄도 안다. 한국인은 참을성이 강하고 황소 같은 기질을 지닌 뛰어난 민족이다”


라고 말했다. 아니 우리 역사를 통해서 우리 자신이든 남이 됐든 우리민족을 이렇게 바로 평가한 적이 있었던가? 우리는 그 동안 스스로 별 볼 일 없는 약소민족으로 자처하고 주눅 들어 살아 온 민족이 아니었던가? 그가 이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이 민족의 특성을 이렇게 정확하게 들여 다 볼 수 있었을까? 그는 또 이 민족의 우수성을 발휘 할 수 있는 구조적인 민족적 자산이 잘 갖춰져 있음을 직시하고 있었다. 헐버트는 한국의 보고(The Korean Repository)란 월간 영문 잡지를 통하여

     “한국어는 공공 연설의 매개물로서 영어보다 더 우수하다”

하였으며 

     “세계 어느 문자보다도 간단하고 폭 넓게 음운을 표기 할 수 있는 한글을 중국인들이         채택해야 한다”

고 감히 주장하고 세계에 알렸다. 사실 한글은 24개의 문자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11,000개의 소리를 표현 할 수 있는 문자(일본어 300개, 중국어 400개)로서 그 우수성이 과학적으로 입증됨으로 문자가 없는 나라에 UN이 제공하는 언어로 한글이 지정된 것만 보아도 헐버트 선교사의 통찰력에 놀라울 뿐이다. 지금은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전 세계인들이 감동하고 있다. 지난 달 파리에서 열린 K-POP공연에 전 유럽 젊은이들이 한글로 된 노래를 따라 부르고 감격하는 뉴스가 생생하게 전해졌다. 또한 모스코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수상자 8명중 5명이 한국인 젊은이들이 대거 입상하여 전 세계 음악계를 놀라게 했다. 어디 예술이나 스포츠뿐인가? 한국은 일본의 36년간의 식민 통치와 참담한 6.25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나 위기를 극복하고 황소같이 일함으로서 국력을 신장시키고 국가를 발전시켜 온 것을 보고 전 세계인이 놀라고 있다.

  한국경제 발전의 노하우(KSP)를 25개 국가에 전수하는 선진국가로 위상이 바뀌었다. 2011년 상반기 현재 무역규모가 8915억 달러로 이탈리아에 이어 세계 9위를 기록하고 있어 11월에는 1조 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문맹률 1% 미만으로 세계 1위, 초고속 인터넷 사용률 1위, 음악 수준이 가장 빠르게 발전한 나라, IQ 세계 1위, 조선, 반도체, 휴대폰 세계 시장 점유율 1위이며 모든 올림픽을 다 치루는 나라다. 그렇다! 헐버트가 지적한 데로 오직 우수한 말과 글을 바탕으로 인내와 억척스러움으로 고난을 극복하고 지식과 과학적인 역량을 축적하여 합리적인 사고를 하게 됨으로서 어리석음과 가난과 갈등을 극복하면서 국력을 키워오게 되니 세계인들이 보기에 신비로운 민족임이 틀림없다. 헐버트는 “나는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고 친구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하더니, 결국 1949년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내한 했다가 86세의 고령의 나이로  42년 만에 다시 찾는 한국여행이 무리가 되었던지 한국 땅을 밟은 지 1 주일 만에 서울 위생병원에서 별세하니 그의 유언에 따라 한국 땅 양화진 언덕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있다.

  양화진에는 한국을 사랑하며 일생을 바치고 죽은 그들이 그들의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잠들어 있는 선교사와 성직자와 선각자들의 감동적인 삶의 향기가 뿜어나는 생생한 역사의 현장이다.


  미국 남감리교회 여성 선교사로 파송된 루비 켄드릭 (Ruby R. Kendrick, 1839-1908)이 급성 맹장염으로 26세의 젊은 생애를 마감하고 여기에 누어있다. 그의 묘비에

     “나에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조선에 바치리라”

새겨져 있다.

  미국 감리회 평양 개척 의료 선교사로 광성학교를 설립한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 1860-1894)은 “주님이 명령하매 조선에 왔고 다시 명령하매 3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고 마펫트 선교사는 술회하였다. 복음을 위해 이 땅에 발을 디뎌 놓은 후 대대로 이 땅에서 호흡하는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 일가가 이 언덕에 누워있으며, 아직 깨어나지 못한 한국 사회의 근대화와 교육을 위하여 헌신하다가 군산 앞 바다에서 순교한 배제학당을 열었던 아펜셀라(Henry Gerhart Appenzeller, 1858-1902)일가 등  수많은 성직자와 선각자들이 여기에 있다. 의료와 문서 선교로 이 민족이 새로운 문명에 눈 뜨게 했던 헤론(John W. Heron,1858-1890)이 그가 죽어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이 곳 양화진에 묻힘으로 선교사 묘원이 생긴 지 이제 122년이 흘렀다. 오늘도 우리는 이들이 잠들어 있는 언덕을 무심코 지나쳐 왔으며 우리 국민 대다수는 양화진에 선교사 묘역이 있는지 또 누가 왜 거기에 잠들어 있는지 모르고 지내고 있다. 우리는 오늘 특별히 군 선교의 초석을 다지고 이 민족을 향한 사랑을 목숨으로 증거하고 양화진 제2 선교사 모역 F-5, F7-8에 잠들어 있는 윌리엄 얼 쇼(William Earl Shaw, 1890-1967)가족의 생애를 뒤 돌아 보려한다. F-5 구역에는 쇼 선교사의 외아들 윌리엄 해밀턴 쇼(William Hamilton Shaw, 1922-1950)의 비문이 있고 거기에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한복음 15:13)”의 글이 새겨져 있다. 왜 그는 28세의 젊은 나이로 그의 부모님과 함께 이 땅에 묻혀 있으며 그가 목숨을 바쳐 구하려 했던 친구들은 어디에 있는지 찾아 보려한다.


  선교사 윌리엄 얼 쇼( William Earl Shaw, 한국명 徐煒廉)


윌리엄 얼 쇼는 1890년 8월 22일 시카고에서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오하이오 신시내티(Cincinnati)에서 살고 있다. 어릴 적부터 부모를 따라 교회에 다녔으며 특히 어머니로 부터의 신앙적 감화를 많이 받고 자랐다. 그가 스무 살 때 크리스마스 선물로 부모님으로부터 만년필을 받고 싶어 했었는데 기대와는 달리 그의 어머니는 그 에게 두툼한 성경책 한권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었다. 그 때는 탐탁지 않게 생각했었지만 그 성경은 그의 삶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일생을 통하여 삶의 지표가 되었다. 그 때부터 그는 34번이나 그 성경을 읽었으며 시편과 예언서를 즐겨 읽었다. 특히 시편 91편은 그 가 애송하는 구절이었다. 가정이 넉넉지 못한 그는 고등학교 1년은 주간을 다니고 2년간은 주간에 일을 하고 야간학교에 다니면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영문학, 역사 또 다른 몇몇 과목은 독서로 보충하였다. 그는 겨우 고등학교 과정을 가까스로 마치고 가축협회의 회계원으로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홀로 사무실에 있었는데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그에게 들려왔다.

   “대학에 가라 ”

그는 어리둥절하여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것인지 알지 못하고 혼자말로

   “나는 고등학교 정규과정을 마친 것이 아니어서 대학에서 받아주지도 않는 처지입니다” 

그렇게 중얼거렸더니 또 분명한 음성으로 

“대학에 가라”

는 음성이 또 들려오는 것이었다. 그 에게 주님이 역사하는 것이라 믿고 그는 주님의 명령대로 해 보겠다고 결심을 했다. 주님은 이미 그가 달려갈 길을 열어놓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결국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정들었던 고향 신시내티를 떠나 Ohio Wesleyan University(OWU)가 있는 델라웨어(Delaware)로 갔다. 델라웨어에 도착했을 때 그의 주머니에는 단돈 $1.27이 있었을 뿐이며 4년 후 대학을 졸업했을 때에 역시 그의 주머니에는 $100가 있었다. 대학에 가기 위해 저축해 놓은 돈이 한 푼 없었어도, 대학에 가기위한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어도, 대학에 가겠다고 결심을 하고나니 주님께서는 길을 열어주고 인생의 길도 열어 놓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이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고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차고 넘치게 하신 요한복음 6장의 이야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보리떡 한 개 밖에 없었던 그에게도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장학금으로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고 채플의 교목까지 되지 안했는가?


   그가 대학을 졸업할 때 까지 그에게 보여주는 주님의 은사는 더욱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 대학 1학년과 2학년 때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으며 개인적으로 가슴 아픈 슬픔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웨슬리안 대학에 입학하기 위하여 델라웨어로 올 때 거동이 불편한 어머님도 함께 모시고 왔다. 그가 대학생이 된 것을 누구보다도 기쁘게 생각하고 자랑스러워했던 그 어머님이  대학생이 된지 얼마 되지도 않은 그 해 4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그의 가족은 이제 풍비박산이 된 셈이었다.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어머니를 끝까지 간호하며 보살폈던 누나 제시(Jessie)는 그의 고향 친구와 결혼하기 위하여 고향인 신시내티로 돌아갔으며 나중에 그의 아버지도 결국 누나 제시가 돌보게 되었다. 그는 졸지에 외톨이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나는 아직도 외롭지 않다.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 오신 주님께서는 나를 홀로만 있게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성령이 나를 편안하게 하며, 나는 여기 고향이 아니라도 멀리 다른 곳     에서 주님을 위하여 무슨 일이던지 할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신시내티에서 여름 야외극 공연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도 Oxenham 찬송을 부르고 아프리카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리빙스턴(David Livingston)이야기를 주제로 삼은 공연에 열렬히 참여하였다. 공연에 참여하면서

윌 쇼 자신이 깊은 감동을 받고 성령을 받았다.

   “윌 쇼! 너도 저렇게 할 수 있느냐 ?”

음성이 또 들려왔다. 비록 어둠속이었지만 주위에는 수백 명의 관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윌 쇼는 부끄럼도 없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 주님이 바라시면 어디든지 가오리다.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고 들을 건너리다.

         당신이 말하라 하시면 말 하리라,

         당신이 있으라 하면 있겠습니다. “


어릴 적 주일학교에서 배웠던 데로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후에 그는 그 노래대로 주님의 명령을 따라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고 들판을 건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두 번의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때 언제나 전선의 최전방에 있었다. 의무병으로 군목으로 피 흘리고 상처받은 영혼들을 돌보면서 전쟁을 치렀다. 그는 신혼의 단꿈이 깨기도 전에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땅 끝 나라 조선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망망대해 태평양을 건너 이 땅에 발을 디뎌 놓았다. 낯설고 험한 조선의 산하를 발이 불어터지도록 험한 산길을 돌고 돌았다. 그것도 조선에서 가장 험하기로 이름난 관서지방 150 마일을 가로 질러 순행하면서 순회목사로 감리사로 사경회를 인도하고 성경 반을 가르치고 설교하고 새로운 교회를 일으켜 세우기 위하여 연중 154일을 노상에서 시간을 보내게 될 줄을 누가 짐작이나 하였겠는가!  오직 그 분만이 알 일이었다. 그가 조선의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었던 41년 동안 평양을 출발점으로 희천, 운산, 영변, 태천, 신천과 구장에서 영덕, 만주지방, 해주지방, 몽고지방을 수없이 돌고 돌았다. 해방 후에는 서울에서, 한국전쟁 중에는 피난민과 함께 부산과 대전에서 월남한 교역자들과 실향난민들을 위하여 목자로서 군목으로서 교육자로서 이 시대 이 민족의 아픔과 슬픔을 같이하면서 상처를 달래고 위로하기 위하여 이 땅의 산하의 골짜기 까지 구석구석 찾아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이 민족의 산하를 사랑하게 되고 이 민족이 주님의 위로를 받아 마땅한 착한 주님의 백성임을 알 게 된 것이다.


1915년 6월 대학 학3학년 때 그는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의 YMCA 회장이 되었다. 다른 12명의 학우들과 함께 Eaglesmeer근처에서 Y미팅이 있었는데 그는 그때에 해외선교사로 지원하는 지원서에 서명을 했다. 1916년 여름에 사랑스러운 아델린을 만나게 해 주었다. 그 녀는 신앙심이 깊은 여성이었으며 그 녀 역시 해외선교에 뜻을 품고 있었으며 주님께서 원한다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각오가 있었다. 그들은 장차 결혼하여 함께 선교사로 봉사할 것을 다짐하였다.


윌 쇼는 선교사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침내 1916년 9월에 보스턴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그해 말에는 보스턴 신학대학원의 워런 채플의 교목으로 임명되었다. 보스턴에 있을 때 아델린으로부터 오는 편지를 기다리는 즐거움으로 외로움을 달래었다. 그 들은 다음해 7월에 결혼하기로 약속을 했다. 그런데 미국은 1917년 4월 윌슨 대통령이 의회의 승인을 얻어 독일과의 전쟁을 선포함으로서 연합군에 참전하게 됨으로 세계 제1차 대전 전쟁 당사국이 되었다. 조국은 젊은이들을 부르고 있었다. “육군은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I want you, for U. S. Army)” 그 당시 참전 포스터가 거리마다 붙어 있었다. 젊은이들은 조국이 부르고 있는데 외면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애국심이 투철한 윌 쇼로서는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주의 종으로서 전쟁터에서 적국의 병사를 어떻게 죽일 수 있을까? 갈등이 일고 있었다. 그렇다! 지금이 바로 주님께 간구하고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때다. 기숙사 침대 옆 바닥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간절히 기도하는데 전쟁터에서 병사들이 부상당하여 상처를 움켜주고  ‘물! 물! 물 !’외치며 절규하고 있는 환상이 펼쳐지더니 하얀 가운을 입은 사제가 나타나서 붕대를 감아주고 물을 주고 치료해 주는 장면이 안개 속에서 전개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전우들을 돕는 일을 해야 하겠다. 그는 벌떡 일어나 그 길로 자기 모교가 있는 델라웨어로 달려가 의무병으로 미 육군에 자원입대하였다. 훈련을 받은 후 곧 미 국방경비대 42사단 레인보우 부대에 배치되었고 유럽전투에 의무병으로 부대 배치를 받은 것이다.

  마침내 1918년 11월 11일 독일은  연합군에 항복하고 말았다. 18일에는 휴전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그 부대는 독일 점령군 주둔부대로 명령을 받아 독일에 남아 있어야만 했다. 그는 다시 주님께 간구하였다. “주님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런 기도를 드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의무 하사에서 장교급인 군목으로 인사명령을 받았다. 보스턴 신학대학원을 다니면서 보스턴 채플 교목으로 봉사하다가 국가의 부름을 받아 최전선에서 의무병으로 복무한 그가 적임자 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는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병사들의 상처를 치료하는 의무병이 아니라 전쟁으로 인하여 상처 입은 병사의 마음과 영혼을 치료해주는 목자가 된 것이다. 그는 결국 조국을 떠난 지 1년 6개월 만에 1919년 4월 26일 2시에 뉴욕 ‘자유의 여신상‘에 거수경례를 하고 은화 한 닢을 여신상을 향해 힘껏 던져 귀국보고를 했다.


이제 윌 쇼는 사랑하는 아델린과의 결혼을 더 이상 미뤄야 할 이유가 없다. 드디어 1919년 7월4일 주위의 축복을 받으며 미 육군 군목의 유니폼을 입고 오하이오 리마(Lima)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일 년 후에는 그들의 첫딸 메리제인(Mary Jane)이 천상의 음악을 부르면서 탄생하여 그들에게 하느님의 첫 선물을 안겨 주었다. 이제는 가족을 부양해야 하며 대학원 과정도 마쳐야 하며 아델린의 학업도 도와야 했다. 아델린은 현재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 4학년 졸업반이며 그 들은 이제 서로 떨어져 있지 안 해도 되었다. 그해 가을에는  포웰(Powel)에 있는 고등학교의 중급반 교장 일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두 내외가 학업과정에 있고 양육해야 할 어린 딸이 있어 생활비가 빠듯한 신혼살림이었다. 외국 선교사로 파송되기 전까지 준비해야 할 일들이 많기 때문에 직업을 갖기로 하였다. 마침 지방 철도국 작업반에서 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일은 윌 쇼에게 너무나 생소하고 육체적으로 힘 든 일이었다. 하루에 10시간 일하고 받는 임금은 $2.50이었다. 작업을 끝내면 그야말로 녹초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가 받은 임금으로 가족을 위하여 약간의 고기를 사려고 마을 상점으로 향하는 그의 마음은 뿌듯하였다. 기다리고 있는 가족이 있고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일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를 일이었다.


   1920년 주님은 이제 그에게 구체적인 임무를 부여하기 위하여 두 가지 문을 한꺼번에 열고 그를 들어 쓰시려고 연단하기 시작했다. 하나는 컬럼비아 대학원에 장학금을 받고 대학원에 갈 수 있게 된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뉴욕에 있는 그레이스 감리교회의 부목사로 임명 받은 것이다. 그는 전적으로 그레이스 교회의 청소년부를 지도하는 일을 맡았는데 이일은 그 가 참으로 바라던 사역이었던 것이다. 이제 보수도 도전적인 일을 시도하는 그의 가족에게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다. 이 경험들은, 첫째는 해외 선교사로 활동하려는 그의 삶의 도정에서 매우 값진 훈련과정이 되었으며 둘째는 앞으로 조선에서의 선교사역에 도움이 되고 자산이 될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며, 셋째는 컬럼비아대학에서 석사학위(1921년)를 받게 된 것이었다. 


   주님은 윌 쇼에게 조선에 가서 사역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윌 쇼는 오랫동안 중국의 선교사로 가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가끔 사람들을 통하여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인도하기도 한다.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의 총장이었던 헐버트 웰취 박사는 1916년부터 1921년까지 감리교 조선 감독이었다. 그는 윌 쇼 내외가 동양에 선교사로 갈 의향이 있음을 알고 그들을 초대하여 조선의 선교 상황을 알려주기도 하고 조선선교를 위해서 준비할 사항들을 알려주기도 하였다. 윌 쇼 부부는 조선에 선교사로 가는 문제를 놓고 기도하였다. 결국 1921년 9월 3일 쇼가족은 쌘 프란시스코에서 조선을 향하는 배를 타고 있었다. 마침 1921년 9월 28일 평양 남산현 제일교회에서 열린 야소교 미감리회 제14회 조선연회에서 쇼 부부는 도착신고를 함으로서 41년간의 조선에서의 선교사 생활이 시작 되었다.


평양 광성고등학교 교육 선교사


  쇼 선교사는 평양의 광성고등학교로 파송되어 김덕수 교장을 보필하면서 학생들의 신앙교육과 학교의 재정업무를 담당하는 교육선교사 (Educational Missionary)로서 조선에서의 선교사역을 시작하였다. 쇼 선교사는 이미 포웰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한 경험이 있었으며 조선에 파견되기 직전 까지도 뉴욕 레이스 감리교회의 부목사로써 청년부를 전담하여 열심히 사역하여 왔기 때문에 광성고등학교에서 사역은 즐겁고 보람찬 일이었다. 부인 아델린도 조선어를 익히며 노블 선교사 부인과 함께 남신현 교회 소속으로 평양 신계구역 전도부인으로 활동하면서 앞으로 조선선교의 사역을 위한 현지 적응과정을 착실히 밟아가고 있었다.


광성학교는 성자로 불리는 홀 박사가 기독교 선교와 교육을 목표로 세운 사숙으로부터 출발하여 문 요한 선교사가 서문밖 가맛골에 2층양옥으로 벽돌집을 지어 “격물학당(格物學堂)”으로 현대식 학교를 세운이후 20여 년 동안 학교를 키워온 결과로 젊은이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명문학교로 성장하게 되었다. 학생과 교사의 학습열기가 뜨거웠으며 신앙교육이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쇼 선교사는 1921년부터 1926년까지 광성학교에 파견되어 사역하였는데 초기 감리교 선교사들 대부분이 구체적 데이터를 제시하면서 과학적으로 연회보고를 하는 경향 이였지만 쇼 선교사는 더욱 더 세심하고 구체적인 데이터를 제시하면서 보고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통계수치를 제시하면서 일목요연하게 보고하였다.


           1922년에는 학생 수 460명 믿지 않는 학생이 7%

           1923년에는 학생 수 572명 믿지 않는 학생이 23%

           1924년에는 학생 수 554명 믿지 않는 학생이 26%

           1925년에는 학생 수 524명 믿지 않는 학생이 10%


또 학교재정에 대해서도 학교의 1년 전체예산이 30,000엔인데


          자체수입(등록금)      16,090엔 (53%)

          선교부 충당금        12,910엔 (43%)

          일본정부 보조         1,000엔 (4%)


쇼 선교사는 1924년부터는 광성학교에 영어 부를 신설하여 운영하면서 선교사 부인들이 학생들의 영어회화와 발음을 지도하였다. 이들은 문 요한 선교사 부인, 안도선 선교사 부인, 쇼 선교사 부인들이었다. 북한에서는 가장 근대적인 교사(校舍)와 실력 있고 성실한 교사(敎師)와 열성적인 신앙교육과 선교사들의 후원을 받고 안정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이 학교는 북한에서는 최고의 명문학교로 자리메김하고 있었다. 1924년 평양의 모든 일본학생과 조선 학생이 참가한 고등보통학교 학력경시대회에서 광성학생이 일등을 함으로서 광성학교의 실력을 과시하였다. 교육과 의료봉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조선에 전해야한다는 선교정책에 따라 세운 최초의 미션계 학교는 서울의 배제고(아펜젤러), 공주의 영명학교(우리 암)와 평양의 광성고(쇼), 영변의 숭덕학교(사워)다. 영명과 숭덕학교는 실업교육을 위한 학교였음으로 상급학교에 진학하여 사회지도자를 양성하는 소위 인문학교는 서울의 배제와 평양의 광성학교가 있을 뿐이다. 조선에 온 미 선교사들은 조선말을 빨리 익혀 유창한 조선말로 설교 할 수 있도록 조선어 공부를 열심히 했으며 모두들 조선어 이름을 가졌다. 쇼 선교사 내외도 광성학교에 부임한 이후에도 조선어 공부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으며 1924년부터는 조선어 이름으로 쇼(徐煒廉)을 갖게 되었다. 1924년 9월 21일 서울 정동교회에서 장로 안수를 받고 ‘천국에 합당한 일군이 되라’라는 제목으로 감동적인 설교를 하였다. 쇼 선교사는 조선에 온 후 줄곧 광성학교에 파송되어 헌신적으로 학교를 돕고 학생들을 지도하고 주말에는 학생들과 함께 묘향산에 오르면서 호연지기를 기르고 아름다운 조선의 풍광에 매료되고 조선의 자연을 사랑하게 되었다.  쇼 선교사가 조선에 건너와 처음으로 파송된 곳이 이곳 광성학교이었음으로 이 학교에 대한 애착과 보람이 남 달랐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쇼 선교사의 삶의 여정 속에서 광성과의 인연은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쇼 선교사는 1926년까지 광성학교에서 근무하다가 1927년도에는 안식년으로 귀국하여 1917년 군 복무로 인하여 중단되었던 보스턴 신학대학원 석사 학위 과정을 마치고 조선에 돌아와 영변지역 감리사로 임명받았다. 1927-1929 년에는 영변, 해주, 만주지역 감리사로, 1931-33년에는 영변지역 지방목사로 또한 신창지방 지방목사로 해주지역 순회목사로 일인 3역을 담당하면서 년 중 154일을 길에서 보내야하는 고된 전도사역의 길을 잘 감당하면서 북 조선 선교 사업을 이끌고 지도력을 발휘하여 북한선교의 발판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엔 선교지역 분할 협정으로 장로교 선교지역은 평양을 중심으로 30 마일 구역이 되는 반면 감리교 지역은 평양을 중심으로 150 마일로 광범위한 지역을 순회하면서 전도를 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특히 쇼 선교사가 담당한 영변지역은 영변시내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고 북으로는 평북의 북진에서 남으로는 강원도 양덕까지로 적유령산맥, 묘향산맥, 언진산맥을 가로지르는 150 마일로 조선에서는 가장 험난한 산악지대를 굽이굽이 찾아가야 하는 전도 구역이다. 1928년에는  영변지역 뿐만 아니라 해주지역과 만주지역까지 담당하는 감리사로 파송 받게 됨으로 영변에서 도로 평양으로 집을 옮기게 되었다. 만주 지방은 물론이요 1929년 겨울에는 배형식 감리사와 함께 철도가 끝나는 내몽고 퉁니오(通遼, Tungliau)집회를 주도하고 전도지역을 확장하는데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몽고지방 여행만도 이번이 네 번째였다1). 조선 주민들이 400명 정도 거주하는 콩지아호(Kongjayho)마을 진흙집 교회에 180명의 교인들과 함께 예배를 인도하였는데 그 집회에서 25명의 동포가 기독교인 되겠다고 결신했다. 두 주일 동안 머무는 동안 매서운 추위와 폐렴으로부터 건강을 지켜준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쇼 선교사는 적었다. 그가 가야 할 곳이라면 험한 산골이든 황량한 동토의 사막이든 가리지 않고 달려가 복음을 전하는 쇼 선교사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다. 그는 3월 달에 영변에서 부인 성경반 두 반을 가르쳤는데 한 어머니는 등에 어린이를 업고 240리를 걸어와서 참석했는가 하면 빈 몸으로 온 한 부인은 적어도 400리를 걸어와서 성경반에 참석하였다. 그 같은 열성을 보고 오히려 목사인 자기가 더 은혜를 받고 기쁨을 얻었다고 술회했다. 오랜 세월동안 무시당하고 천대 받고 살아온 이 나라 이 민족의 착하고 순박한 백성들을 보면서 “진정 위로를 받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 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일제가 1940년 일.독.이 삼국동맹을 맺고 연합국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하는데 적국국민인 선교사들이 자국에 그대로 있다는 것은 용납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논리로 선교사들을 강제 추방하였다. 그러나 쇼 목사는 미국 선교회 대표로 남아서 선교회 재산을 한국선교회에 이관하고 정리를 하고 난 후 맨 마지막으로 1941년 3월 20년간 젊음을 바쳐 선교했던 한국을 떠나고 말았다. 귀국한 쇼 목사는 모교인 웨슬리언 대학에서 1942 년부터 1945년까지 신 학부 교수로 봉직하면서 ‘기독교의 구원’이라는 강의를 하였다. 강좌는 주로 상급반 학생들을 위한 강의였는데 저명한 학자들도 수강할 정도로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마침 그의 아들 빌도 4학년 때 아버지 강의를 들었다.


見危授命한 윌리엄 해밀턴 쇼

 

쇼 목사의 아들 윌리엄 해밀턴 쇼(애칭 빌)는 1922년 6월 5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17세 까지 평양 외국인 학교를 졸업하고 1939년 미국으로 건너가 아버지 쇼 목사의 모교인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에 입학하여 1943년에 파이베타 캅파 우등생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쇼 목사는 “FOR HIS FRIENDS" 란 제목으로 1951년 아들 이야기를 직접 썼다. 쇼 목사는 아들에 대해서 다음과 적고 있다.  두 살 때는 바다의 파도를 보고 겁을 먹었으나 다섯 살 때 수영을 배웠으며 열다섯 살 때에 서해안 소래 해안에서 무의도 까지 네 시간 반이나 수영해서 건넜으며 스무 살 때에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 수영팀 대장이었다. 다섯 살 때 빌은 두 개의 손가락으로 덧셈을 하려고 애를 썼다. 어떤 문제에 집중하여 해결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이는 성격이었다.

   열다섯 살 때에 고등학교 물리에서 나오는 수학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몰두하며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을 결국 피 베타 카파 키를 받으면서 우등으로 졸업했다. 세 살 때는 아버지가 연주하는 트럼본을 연주할 때 어린 빌은 뛰어 올라 밀쳐 트럼본을 밀어보던 어린아이가 18살 때에는 대학 축국시합 경기 때 트럼본 연주로 축하행진 공연을 했다.

    그가 열 살 때에는 그의 친구들 짐, 존, 스타시, 부치와 함께 항해술에 대하여 열띤 논쟁을 벌이는 모습을 보이더니 스므살때에는 대학대표로 펜실베이니아에서 열린 대학 간 토론자 대표로 참가했다. 이미 열한 살 때 가수로서의 소질을 보이더니 21살 때는 채플 합창 단원이었으며 머피홀 친구들을 지휘하여 그의 애인 주아니타를 위한 마네의 세레나데를 불렀다.

   열여섯 살 때 그는 평양외국인 학교 보이스카우트 상급반 제1 분대장이었는데 4년 후에 그의 모교인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의 학생회장이 되었으며 컬럼비아 대학의 해군사관학교에서 사관생도대장이었다. 여섯 살 때 평양에서 스케이트를 처음 배울 때 몇 번이고 넘어졌다. 그러면 조선 아이들이 깔깔대며 웃어 대어도 기어이 혼자서 일어나 다시 시작하는 다부지고 당찬 사내아이였다.

   그야말로 그는 무슨 일이던지 적극적이었다. 공부할 때에도, 수영을 할 때에도 스케이팅을 할 때에도 적극적이며 열성적 이였다. 적극성은 그를 표현하는 핵심요채다.

  

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만 보아도 빌은 모든 선생님들이 주문하는 바를 그가 다 보답하던 젊은이였다. 부모에게는 너무나 자랑스럽고 대견한 아들임에 틀림없다. 적극성이 그를 표현하는 핵심이라고 한 것은 그의 아들을 정확하게 표현한 것 같다.


1941년이 되자 전쟁기운이 점점 임박해지게 되어 육군과 해군에서 젊은이들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 그는 결국 해군장교가 되는 해군 V-7 프로그램 코스를 밟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자신의 결심을 먼저 부모님들에게 알리고 허락을 받았다. 이제 그는 그의 진로를 결정하고 대학과정의 방향을 조정하여야만 했다. 그는 사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극동문제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었다.


1943년 빌은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바로 해군사관후보생 학교에 입교하였으며 사관학교에서는 생도중대의 중대장이었다. 그는 학교 동창생이며 장로교 목사님의 딸인 주아니타 로빈슨(Juanita Robinson)과 그 해 결혼하였다. 사관학교 과정을 마치고 1943년 10월 20일 해군소위로 임관하여 소 함정 훈련센터로 명령을 받았으며 1944년 1월 15일 연합군의 작전지역인 영국해협으로 출동하였다. 해군 소위 윌리엄 해밀턴 쇼는 미 해군의 PT518 소함정을 조종하는 부 함장이고 함장은 허치슨 듀보스 중위이다. 승무원은 장교 2명을 포함하여 14명이었다. PT518은 해안에서 특수 업무를 수행하는 소함정으로 갑판에 두 개의 어뢰가, 포탑에는 50-cal기관총 두문이 설치되어있고, 또 대잠수함 폭뢰 2문, 37mm, 40mm대포, 그리고 매연발생기등으로 중무장한 길이 80피트 폭 20 피트의 소함정이다. 해상, 해저, 비행기 공격이 가능한 전천후 공격용 함정이다. 이 함정은 1944년 6월 감행된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앞두고 1944년 1월에 유럽해협에 출동하여 독일군의 함대 이동상황과 해안 정찰 등 특수임무를 수행하면서 유럽전선에서 독일군이 퇴패하고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활동했다.

1944년 6월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세계 제2 차 대전의 전세가 중대한 전기를 맞게 되는 D+18일, 연합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우어 장군과 클라크 대장을 비롯한 VIP들이 전선시찰차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하였다. 해안에 상륙하기 위하여 군함에 있던  VIP들은 PT518함정으로 옮겨 타고 쇼 소위는 PT518함정을 직접 운전하여 그들을 상륙시키는 작전을 성공작으로 완수하게 된다. 미 육군에서는 그 당시의 사진을 아이젠하우어 장군이 직접 자필서명까지 해서 PT518함 장병들에게 보내주었다. 인권을 존중하는 민주주의 국가의 지도자라고 하지만 작전 수행중 지휘관들의 수송을 담당했다 하드래도 최고사령관들이 직접 자필서명까지 해서 부하장병에게 보내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PT518함정의 임무가 역사적인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었으며 그 들의 충성심을 높이 평가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독일은 1945년 5월 7일 연합군에 항복함으로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나게 된다. 대전이  끝나면서 빌은 1945년 9월 중위로 진급되었고 해군교육기관인 볼더의 콜로라도 대학으로 동양 언어교육 명령을 받고 귀국하게 됨으로 거칠고 험난한 영국해협에서 고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 태평양 전쟁도 종지부를 찍고 세계는 새로운 질서를 찾게 되는 때에 빌 쇼는 4년여의 해군 복무를 마치고 1946년 9월 1일 해군의 현역복무를 끝내고 제대하게 된다. 

 

1944년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D+18일에 연합군 사령관 아이젠하우어 대장과 커크제독등 VIP를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시키기 위해 PT518함 운항장교인 윌리엄 해밀턴 쇼 소위가 직접 운전하여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후에 육군에서는 그 사진에 아이젠하우어 장군이 친필서명까지 한 사진을 PT518함 장병들에게 보내주었다.


  미군정에서는 한국어에 능통하고 한국의 실정을 잘 알고 있는 해군의 베테랑 빌 쇼를 후에 해군사관학교가 된 해안경비대 사관학교의 항해술과 함정운용술 민간인 교관으로 임명하였다. 한국을 위해 일하기를 바랐던 빌로서는 참으로 좋은 기회였다. 1947년 2기생부터 가르치기 시작해서 한국정부가 탄생해서 해안경비대 학교에서 대한민국 해군사관학교로 새 출발할 때 까지 교관을 했다. 그 당시 그들을 가르쳤던 해사 2기, 3기생의 노병들은 그 때의 추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디. 주아니타와 아들 빌리도 한국으로 와서 진해에 함께 살았다. 쑈 목사도 1945-1946년 필리핀 선교사로 파송되었다가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 두 쇼 가족은 이제 같은 서울에서 가까이 지내면서 협력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1948-1949년 2년 동안 서울의 쇼 가족은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아델린은 모처럼 사랑하는 아들과 며느리와 손자와 함께 역사 깊은 한국의 고궁을 찾아가는 가족 나들이도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누리는 행복감이다.


그때 빌 쇼 인생의 중요한 고비를 제공하는 사건이 1949년 3월에 일어났다. 그것은 그의 친구이기도 하고 그의 부모들과도 매우 친한 연희대학교의 명예총장인 호러즈 언더우드 박사의 부인 에델 언더우드가 공산주의 자객에 의해 살해당하는 끔직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빌은 이 사건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 사건이 터진지 일주일 후에 마침 그의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속에서

“에델 언더우드 대신으로 한국에 선교사로 네 명을 더 뽑을 계획이다”

이야기를 듣는 순간 빌은 운전하고 있는 아버지 무릎에 손을 얹고

“저도 그 중의 한 사람이 되겠어요!”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 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의 진로를 이끌어 가고 있었다. 빌은 이제까지 자기가 가야 할 방향에 대하여 방황하고 의심하다가 “나는 한국의  선교사가 되어야한다” 마음을 결정하고 나니 몸과 마음이 날아 갈 듯이 가벼워 졌다. 이제 독립된 한국을 위하여 봉사할 선교사들은 먼저 박사학위를 갖고 있어야 하며 더 어떤 경우에는 의학적 훈련과정도 거치기를 요구하는 상황이었다. 선교부에서 중책을 맡고 있는 쇼 선교사는 누구보다도 그 당시의 선교사 선발규정을 알 고 있었다. 빌이 일단 결심을 하고 그의 부모님과 주아니타와 상의하여 하버드 대학으로 가서 석사, 박사를 취득하고 한국의 선교사로 돌아와 연희대학에서 선교사 교수로 봉사하기로 결심을 하고 그에 대한 준비를 하기로 했다. 하버드에 가서 ‘극동문제’를 좀 더 체계적인 학문을 성취하여 한국인들을 돕고 한국인들을 위하여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갰다고 확실하고 구체적인 목표를 갖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방황하고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1949년 크리스마스에 모든 쇼 가족이 오하이오 델라웨어에 모였다. 하나님께서는 1945년 이후 5년 만에 다시 온 가족이 함께 하는 축복을 그 가족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것이었다.

 1950년 2월 쇼 목사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고 빌은 그의 가족과 함께 하버드 대학원 석사과정을 위하여 매사추세츠로 갔다. 6월 달에는 매사추세츠의 이스트 브렌트리(East Braintree)감리교회의 학생 목사로 임명받아 한국전에 참가할 때 까지 단 한 달간 사역하면서 세 번 설교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쇼 선교사는 바로 미 8군에 육군 군목으로 복귀하여 캐롤(George M. Caroll)신부와 함께 일본에 건너가 맥아더 장군의 극동부 사령부 군종과장 베넷(Ivan L. Bennet)군목과 죤 단(John Dahn)신부를 만나 한국에 진주하는 미군에 종군할 것을 논의했다. 그리고 8월 1일 미 8군 군종부의 문관으로 부산에 도착하여 군목으로 종군하였다.


쇼 목사는 캐롤신부와 함께 미 8군 소속 군목으로 한국전쟁 중 임무를 수행하면서 1950년 9월 2일에 국방장관과 국무총리를 차례로 만나고 9월 5일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하여 군종제도의 필요성에 대하여 제의하였다. 9월 13일에는 미 고문단장 프란시스 화전 준장과 인사고문관 피터 스코트를 만나 한국군의 군종제도 도입에 대한  협력을 이끌어 내는 등 한국군의 군종제도 도입을 위한 기초 환경을 다지는데 크게 노력하였다. 1950년 9월 25일 캐롤 신부와 함께 이승만 대통령을 재차 방문하여 한국군에서 군종제도를 실시하도록 승인을 받았다.

  미 8군소속의 군목으로서 캐롤신부와 쇼 목사는 주로 피난민 구조와 성직자들의 보호와 한국정부와 육군과의 연락업무등을 담당했다. 특히 쇼 목사는 유엔군 포로수용소를 방문하여 용공분자로 오인되어 희생당하는 한국인들이 생기지 않도록 특별한 관심을 갖고 경계하였다. 1950년 12월 15일에는 14세의 소녀와 9살 먹은 소년을 포함한 32명의 한국인이 용공분자로 몰려 서울 근교에서 처형당했다는 보도를 듣고 용공분자로 의심되는 35명의 처형을 충분한 조사가 이루어 질 때 까지 한 달간 연기하도록 미 대사관과 미8군 담당자에게 요청하여 허락을 받아냈다. 캐롤 신부는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가기 직전, 신부 7명과 수녀 58명을 포함하여 650명의 피난민을 기차로 서울서 부산으로 수송시키고 쇼 목사는 1122명을 기차와 배로 해군과 민간인 구조 단체를 통해 부산으로 수송시켰다.


  한편 빌 가족은 이스트 브렌트리 교회 사제관에서 무선단파 방송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이 제 막 대학원 석사과정도 한 학기 이수하고 여름학기 등록도 해 논 상태이며 이곳 이스트 브렌트리 교회 목사관저로 이사 와서 모처럼 안정된 생활환경을 갖게 된 것이 무엇보다도 가족을 위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한국에서 전쟁이 터졌다니 이게 사실인가? 믿고 싶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뉴스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으로부터 한국국민들을 구하기 위하여 예비군 장병들은 미군에 복귀하라는 호소가 매시간 라디오로 전해지고 있다. 빌에게는 이 전쟁은 남의 일이 아니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서 한국에서 17세 될 때 까지 살았다. 미 해군에서 제대하고 한국 해안경비대 사관학교 교관으로, ECA관리로 신생 한국의 탄생을 위해 어제까지 일해 왔다. 나는 앞으로 한국에 선교사로 가서 봉사할 예정이다. 부모님들은 한국에서 30년간 선교사로 일해 왔다. 지금도 한국에서 한국인을 위해 위험한 전쟁터에서 군목으로 일하고 있다. 미군 중에서 나보다 한국말을 잘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한국의 해안경비 상황이나 해안을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 지뢰를 매설하고 제거하는 작업을 나 보다 잘 아는 사람도 없다. 한국은 지금 나를 필요로 한다. 위험하고 손을 내밀 때 도와야 함은 사나이가 할 일이다. 짐짓 조용히 있다가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온 다음 부리나케 달려간다는 것은 떳떳하지 못할 일이다. 나는 이제까지 동양에 대하여 연구를 해 온 사람이 아닌가? 禮記 曲禮편에도 臨難毋苟免 狠毋求勝이라고 안 했는가? 구차하게 난을 피하고 비겁하게 승리를 취할 수는 없다. 주님도 우리를 향해 뭐라고 하셨는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Greater love has no one than this, that he laydown his life for his friends. John 15:13)하지 않으셨는가? 그럼 친구는 어디에 있는가?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에 시달리고 있지 않은가? 나는 한국의 전쟁터로

 

 

 

  1950년 6월 25일 메사추세스 이스트 브렌트리 감리교회 목사관에서

  빌 쇼 가족이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는 뉴스를 단파방송으로 청취하고 있다.

 

가 봐야 한다. 아니 꼭 가야한다. 나는 미군 대위로 조국이 부르면 언제든지 출정하겠다고 금년 2월 6일 워싱톤에 가서 맹세한 미 해군 장교가 아닌가? 결심을 하고 한국에 계시는 부모님께 편지를 썼다.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는 뉴스를 접한 이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하고 부심하였습니다. 물론 저는 조국이 부르면 응해야 하는 예비군 장교입니다. 저는 부름을 받지 않을 수도 있지만 우리가 전쟁 중에 있으면 우리 국민 누구나 국가의 부름에 응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즉시 군에 복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미군 중에서 한국어를 할 수 있고 군사정보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호러즈 언더우드와 저 뿐인데 호러즈 언더우드는 지금 한국에 있습니다. 저는 지금 한국이 위기상황에 놓여 있을 때 저의 지식과 경험을 갖고 한국을 도와야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아니타와 저는 앞으로 한국에 가서 선교사로 봉사할 계획을 세워 놓고 있는데 지금 한국을 돕지 않고 기다리면서 대신 다른 사람들이 한국인을 위해 희생하고 우리를 위하여 희생한 다음, 평화가 이루어지고 난 다음 우리가 한국에 제일 먼저 달려가 선교사가 된다는 것은 떳떳치 못한 일이라고 생각되어 졌습니다. 한국에서 우리의 도움이 3년만 필요하다 해도 저는 3년도 더 한국인을 도울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저는 지난주에 워싱톤에 갔습니다. 내가 무엇을 도울 수 있으며 가능한 일들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해군에서는 저를 바로 정보장교로 임명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현역으로 복귀하기로 지원했으며 7월 20일 신고하고 가능한 한 빨리 한국으로 떠나기를 희망했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이러한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참으로 힘들었다는 것을 이해해 주실 줄 믿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제가 필요하고 가야만 하는 당위성은 충분한 설득력을 갖고 있었지만 저에게는 너무나

많은 일들을 포기하고 단념해야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트 브렌트리 교회에서 학생 목사로 임명받은 것은 주아니타와 저에게는 너무나 좋은 축복이었으며 목사관은 우리들에게 너무나 훌륭한 안식처이기도 했습니다. 그곳 성도들도 우리에게 너무나 잘 대해 주었으며 내가 떠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설명 드려도 후에 반드시 그 교회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으면서도 아쉬워했습니다. 하버드에서 여름학기 등록을 완전히 끝냈으며 석사 첫학기도 잘 치러냈습니다. 극동문제 전문가이신 몇몇 교수들도 내가 그 동안의 봉사와 경험들이 제 연구과제 수행을 위해매우 가치경험들이었다는 점을 인정하였으며 특히 한국에서의 경험들은 이번 여름학기 다음 학기에 이루어지는 한국에 대한 학술적 연구에 자동적으로 검증되어지는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기대를 전부 접어야만 했습니다. 대학당국자는 내가 다시 등록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하지만 하버드에서 진행되는 모든 프로젝트들이 취소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아들의 편지를 받아본 부모들은 감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쇼 선교사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과연 내 아들이다.”

한편 빌은 자기 누이 메리제인과 장거리 전화로 아버지가 또 다시 군목으로 출전하기 위하여 군복을 입었다는 말을 듣고 자기 누이에게

“과연 우리 아버지이시구나!”

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윌리엄 해밀턴 쇼는 마침내 8월2일 미 국방성 명령으로 미 해군 대위로 현역복무 명령을 받고 특별 항공편으로 미 극동군 사령부가 있는 도교로 가서 극비 인천상륙작전 계획 팀의 특별참모로 임명되어 맥킨리 기함에서 맥아더 장군을 최측근에서 보좌하게 되었다. 빌은 1948년 한국근무당시 한국해안에 매설된 기뢰제거작업을 지도한 실전 경험자이며 한국해안 경비상황과 지리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50년 9월 14일 빌은 함상에서 그의 부모님께 마지막 편지를 쓴다.


아버님! 저는 지금 어머니에게도 이 편지를 씁니다. 혹 어머니께서 좀 더 빨리 이 편지를 받을 수도 있다고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몇 주 전에 도교에서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있었던 일을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습니다. 지금 어머니가 이 상황을 잘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놀랄 뿐입니다. 저는 지금 어떤 이야기도 말할 수 없지만 곧 뉴스에서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고향땅에 가까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알게 될 때는 더욱 더 고향에 다가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아버님께 아무것도 이야기 할 수가 없습니다. 이 편지를 받을 때쯤에는 아버님이 우리들 이야기를 하시게 될 것입니다. 호러즈 언더우드와 저는 함대의 선단에 있으며 서로 의지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상황을 이야기 하거나 설명할 수 없지만 아버님께서는 저를 믿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 명령을 대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름답게 날이 밝아 옵니다. 1947년 여름과 같이 아름다운 아침입니다. 아버님! 곧 중대한 결정이 내려지고 상황이 잘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아버님이 전선으로부터 좋은 소식이 전해지기를 기원합니다. 이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고 1944년 때처럼 간절하게 그의 지극한 사랑이 우리에게 미치도록 기도하는 일 뿐입니다. 저는 오히려 마음이 평온하고 내가 여기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되어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고 또 주님께서는 저에게 이런 평안을 주고 계십니다.


다음 날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수행되었다. 빌과 호러즈 언더우드는 기함 맥킨리 함상에서 맥아더 장군과 스트러블 제독과 함께 있었다. 해안을 따라 접근하면서 한국의 해안 상황과 조류에 대하여 물으면 대답하면서 한국을 향해 항해하였다. 빌이 맥아더의 눈과 입이 된 것이다.

인천상륙 일주일 후 빌과 호러즈 언더우드는 미 해병 제 5연대 최전선 가까이에 밀착하여 한강을 도하하여 서울탈환을 목표로 서울의 동쪽자락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그들은 5연대가 서울을 향해 진격함에 따라 잡힌 공산 포로와 시민들을 심문하면서 나아갔다. 빌과 호러스가 아니면 공산군과 대한민국 국민을 구분할 수 있는 미 해병이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언제나 미 해병대 첨병부대와 함께 전진하고 있었다. 9월 15일 인천에 상륙한 미 해병들이 적의 수중에 있는 서울을 향해 진격해 나갈 때 선량한 국민을 공산군으로 생각하고 총살해 버리려고 할 때 빌이 아니었다면 희생 당 할 뻔 하다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 마다 빌은 안도의 숨을 쉬고 내가 여기 오길 잘 했다고 생각하고 해병대의  진격과 함께 최전선을 따라 이동하였다. 오직 빌 만이 평양에서 온 공산군과 남한 국민을 구별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 해병 5연대 2대대 전방에 한국 해병대 1연대 1대대는 연희동 능선에서 완강히 저항하는 북한군을 격멸하는데 전과를 올리고 미 제 5연대는 안산(296고지)과 105고지를 점령하기 위하여 3개 대대로 나누어 세 방향에서 공격을 전개하였다. 박격포와 공중폭격으로 연희대와 그 뒷산 능선을 맹타하였다. 호러즈 언더우드와 빌은 어느 대대를 따를 것인가 상의하였다. 이 때 호러즈 언더우드는 2대대를 따르고 빌은 3대대를 따르기로 하였다. 2대대는 연희능선을 취하기로 되어있고 3대대는 208고지를 취하기로 되어 있었다. 빌이 따르는 3대대가 216고지(현재 녹번리 구역)의 북쪽에 캠프를 쳤는데 맥믈린(Rovert A. McMullen)대위가 3대대의 중대장이었다. 9월 21일 저녁 쇼 대위는 1소대 소대장 윌리엄슨(Wallace L. Williamson)중위의 판초에서 같이 밤을 새웠다. 그런데 5연대 3대대는 적의 작은 저항이 있기는 했지만 안산(296고지)을 2시간 만에 점령하였다. 한편 낮은 지대에 배치한 1 대대에서는 박격포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북한 인민군의 강력한 저항을 받아 하루 종일 전투가 치열하였다.

   3대대 대대장은 열려진 해병대의 북쪽과 동쪽 전선을 견제하고 5연대 좌측방의 해병 7연대의 서울 접근을 위해 매복자를 색출하고 북한군을 고립시키고자 순찰대를 보내기로 하였다. 쇼 대위는 윌리엄슨 중위가 인솔하는 순찰대와 동행하였다. 그의 임무는 녹번리 방향을 수색하는 것이었다. 쇼 대위는 전진하는 동안 농부들을 만나 정황을 물어보고 조심스럽게 동북쪽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었다. 정오가 지나고 한낮인데도 사방은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한 해병과 빌이 앞에 가고 본대는 뒤에 따르고 있었다. 그들이 숲 쪽으로 접근하는 순간 갑자기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숲속에 매복되었던 적병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공격은 세 방향의 언덕에서 일제히 감행되었다. 해병이 먼저 그 자리에 쓰러지고 쇼 대위도 바로 쓰러졌다. 뒤 따르던 수색대는 황급하게 은폐물을 찾아 대피하면서 응사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도로에 쓰러져 있는 전우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2시간 동안 쌍방이 내뿜는 불꽃으로 아무도 전진도 후퇴도 할 겨를이 없었다. 구조를 위해 도착한 아이템 중대가 도착해서 전투가 해병대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윌리엄슨 중위가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쇼 대위를 이끌어 내기 위한 구조대를 보낼 수 있게 집중 포격을 가해 공산군을 잠잠하게 만들었다. 윌리엄슨 중위는 쇼 대위가 한국에서 오래 살았으며 한국어에 능통하다고 대대본부에서 강력히 추천한 것 말고는 쇼 대위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었지만, 지난밤 같은 판초에서 지내고 나서부터 친구가 되었다. 6명의 해병대원이 빌을 녹번리로 끌어내기 위하여 구조대를 결성하였다. 그들은 병장   불름(Robert F. Blum), 병장 브라질(Walter C. Brazil), 병장  렌즈   (Anold A. Lentz), 이병       트레슬러(Edward L. Tressler)이병 젠킨즈 (R.C. Jenkins), 이병    티쉴러 (Thomas S. Tischler) 6명의 해병대원들이었다. 구조대는 방호 막을 의지하면서 병장 렌즈가 그들을 이끌고 쇼 대위에 접근하였다. 쇼 대위는 의식은 없었지만 아직은 숨을 쉬고 있었으며 아래 몸통에 몇 개의 구멍이 나서 등으로 나오면서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구조대가 쇼 대위를 들어 판초에 옮기려고 할 순간 공산군이 또 일제히 기관총을 난사하여 병장 브라질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쓰러지고 구조대는 쓰러진 2명의 전우를 대피시켰다. 다른 구조대원은 반사하는 유탄에 다리를 다치는 등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 공산군이 쇼 대위의 머리에도 집중사격을 가했었다. 구조대는 아이템 부대가 공산군이 잠복해 있는 백련산 골자기를 철저히 파괴하는 화력으로 적을 제압하는 가운데 보호막을 의지하면서 순찰대 본부로 가까스로 철수하였다.

  쇼대위와 해병은 의식이 없었으며 구조대로 나간 브라질 병장도 다음 날 전사하였다. 해군 외과의사는 나중에 빌의 아버지 쇼 선교사에게 빌이 치명적으로 당한 것은 내장 파열에 의하여 피를 많이 흘린 것이라고 말했다. 쇼대위와 2명의 해병은 대대응급조치반의 묘지등록반에게 인도되었으며 김포공항 근처에 가 매장되었다. 소식을 듣고 쇼 대위의 아버지가 부산에 있는 미 8군으로부터 날아와서 아들의 무덤을 보게 되었고 9월 28일 수복 후에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사랑하는 아들을 양화진에 묻고 돌아온 아버지 쇼 목사는 녹번리 전투에서 자식과 함께 산화한 두 명의 해병대 영웅들을 위해 1950년 10월 15일 추모예배를 가졌다. 지금 양화진에는 그도 부인도 함께 아들 곁에 잠들어 있다. 곁에 잠들어 있는 아들이 그의 부모님을 향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사랑하는 아버님! 어머님! 불효한 이 자식을 너무 책하지 말아 주십시오! 제가 한국에 온 것은 주님의 뜻에 따른 것입니다. 고향으로 향하는 맥킨리 함상에서 저는 평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는데 지금은 부모님과 함께 있으니 더욱 더 평안합니다.” 

  사실 쇼 대위는 미국국민이고 미국 국민으로서 그의 조국이 부를 때 기꺼이 미 해군에 자원하여 역사적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수행되기 위한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 공로로 그는 미국정부로부터 PURPLE HEART 메달과 2차 대전 승전메달을 가슴에 달고 해군 중위로 제대한 베테랑이다. 그의 아버지 쇼 목사도 유럽전선에서 위생병으로 참전하여 연합군이 1차 대전에 승리하면서 군목으로 제대한 베테랑이다. 쇼 목사 부자는 여기에서 멈추지 안했다. 쇼 목사는 1941년 한국에서 선교사들이 강제추방 당하자 전쟁이 수행되는 위험한 필리핀 선교사로 파송되어 복음을 전하다가 한국이 해방되자마자 바로 입국하여 미 감리교 선교회장으로서 죽어 있었던 미 선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이면서 신생 대학민국 정부 수립과 혼란한 한국사회의 안정을 위하여 동분서주하였다2). 쇼 대위도 해군에서 제대하자 미 국방부에서 관리로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태어나고 부모가 사랑하는 한국을 위해 기꺼이 한국 해안경비대 민간인 교관으로, 혹은 ECA 관리로서 대한민국 국군이 태동하고 새로운 정부가 탄생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지금은 좀 더 높은 차원에서 한국을 돕기 위해서 소망을 갖고 학업 중에 있으며 두 자녀를 둔 가장으로서 이제야 비로소 안정된 생활을 바라는 그를 탓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러한 그가 한국을 돕기 위해 다시 현역에 복귀하겠다는 아들을 말려도 탓 할 사람 또한 없다. 그런데 그들 부자는 기꺼이 한국인 친구들을 돕는데 생명을 바치고 이 땅에서 숨져 갔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 곁에 잠들고 있다. 우리의 기준으로는 그의 부모는 그러한 아들을 말렸어야 했다. 그 아들은 부모님 가슴에 못을 박는 불효를 해서는 안 되다. 어떻게 해서라도 위험한 고비는 넘겼어야 했다. 그 들 부자는 무모했다. 죽을 필요가 없었는데  죽었다. 우리를 친구로 생각 할 필요까지 없었는데 그 들 부자는 너무 외투 했던것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들이다. 1866년 9월 5일 미국상선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평양 대동 강변에 상륙하여 성경을 나눠 주다가 참변을 당한 토마스 선교사를 향해서도 우리는 조선 사정을 너무 모르고 무모하게 선교를 하려다가 당한 참변이라고 말 하고 싶어 한다. 청일 전쟁이 끝나 한 달도 채 안된 1894년 10월 초순 닥터 홀과 마펫 선교사가 죽은 병사들의 시체가 즐비한 평양으로 들어갔다. 부상당한 군사들을 치료하다가 홀 박사 자신이 이질에 걸려 서울로 이송되는 도중에 또 장티푸스에 걸려 거의 죽을 몸으로 서울에 도착했다가 결국 11월 24일 숨을 거두고 양화진에 잠든 닥터 홀을 우리는 또 무모하다고 말 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 들이 흘린 피와 땀이 없었더라면 죄악으로 관영했던 평양이 선교 반세기 만에 43%의 시민이 기독교인이 되어 있는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변화 될 수 있었을지 생각해 본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 늘진 땅에서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이사야 9:1-2)”


1950년 9월 15~29일 사이에 벌어진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작전은 세계전사에 길이 빛나는 전과로 유엔군과 한국해병대의 영웅적인 투쟁으로 쟁취된 결과였다. 그 중에서도 서울수복 최전선 돌파 전투에서 산화한 미 해군 대위 윌리엄 해밀턴 쇼는 서울탈환 작전의 첫 번째 영웅이며 첫 번째 무공훈장 수상자였다. 한국 정부는 그에게 충무 금성훈장을 수여했다. 해병 5연대 3대대 유진 오브리건 일병, 해병1 연대 2대대 스탠리 크리스티언손 일병도 명예 훈장을 받았다. 한국전에서 총 131명이 명예훈장을 받았다. 명예훈장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전우에게 수여한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예수님도 언명했다. 윌리엄 해밀턴 쇼는 주님이 명령한 계명을 목숨으로 증거한 것이다. 크리스티언손도 해병에서 제대하고 해병이 좋아서 다시 입대하여 오키나와에서 근무하고 있다가 한구전쟁이 나서 서울탈환 작전에서 친구를 구하고 전사했다. 그러나 쇼 대위는 전쟁이 터지자 한국인을 구하기 위하여 현역에 복귀하였다. 그의 모든 소망과 소중한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달려온 것이다. 그리고 인천에 상륙하여 하마터면 잃을 번했던 수백 명의 한국인을 살려내면서 자신은 죽었다.


쇼 목사의 외아들 쇼 대위가 서울탈환작전에 참가했다가 일 주일 만에 녹번리 전투에서 장렬하게 산화한 사실을 전해들은 친구들과 고향의 친지들은 쇼 목사 내외를 위로하고 그의 희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헌금을 하기 시작하고 그 헌금으로 쇼 목사가 교수로 있는 대전신학원(목원대)에 1957년 부활절에 기념교회를 건립하여 대학에 기증하였다. 그 기념교회가 목동에 있는 윌리엄 해밀턴 쇼 기념 채플이다. 그 기념교회는 지금은 대전시 유성에 학교가 이전함에 따라 새롭게 신축되어 목원대학의 기념채플로 사용되고 있다.


쇼 대위가 서울탈환작전에 참가했다가 일 주일 만에 녹번리 전투에서 장렬하게 산화한 사실은 북한에서 30 여 년간 선교활동을 한 쇼 선교사의 아들임을 알 고 있는 많은 국민들 특히 월남한 동포들이 안타까이 생각하여 그가 전사한 전사지점에 전사기념비를 1956년 9월 22일 건립하였다. 이때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미망인 주아니타에게 충무 금성훈장을 추서하였다. 건립위원은 백낙준, 정일권, 김활란, 홍정모, 유형기, 신봉조등 43인과 해병대 사령관, 해군참모총장, 이대, 연대, 배제, 광성등 9개 기관등 한국의 저명한 인사들이다. 그러나 이 전사지점에 세운 전사 비는 서울시 도시확창계획에 따라 2010년 6월 22일 까지 응암1동 85-41번지의 어린이 공원 모퉁이에 옮겨졌다가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 153-1 번지 일대에 평화공원을 조성하고 윌리엄 해밀턴 쇼 동상을 6.25전쟁기념 60주년을 기하여 미국에 있는 가족들을 초청하여 동상제막식을 국내외 많은 관심 속에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쇼 선교사는 한국전쟁 이후 미군 군목으로 활동하면서 전쟁고아 구제 사업과 월남 교역자 돕기,

      월남가족 돕기 등 전후 한국 사회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세계 1차 대전 때는 유럽전선에서

      군목으로 활동하다가 귀국하였다. 2차 대전 때는 태평양 전쟁 중에 있는 필리핀에 파송되어 2년간

      봉사하고 돌아왔는데 또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즉시 미군 군목으로 복귀하였다.

       쇼 선교사 부자는 3번의 세계 전쟁에 모두 참전했다.



쇼 가족들의 한국사랑


쇼 가족의 한국사랑은 쇼 선교사 부자들의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는다. 쇼 대위의 부인 주아니타(Juanita Robinson Shaw)는 1956년 두 아들을 데리고 서울로 다시 돌아와 외국인 학교 교사로 봉사하였다. 1963년에는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세브란스병원에 의료사회봉사과를 신설하여 사회봉사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한국인을 돕는데 앞장섰다. 1968년 한국을 떠나 지금은 은퇴하고 오하이오에 여생을 보내고 있다.

  쇼 대위의 큰 아들 윌리엄 로빈슨 쇼(William Robinson Shaw)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하버드대에서 라이샤워 교수 밑에서 ‘아시아 역사와 언어’로 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에서 풀브라이트와 덴 포스 장학재단 책임자로 1981-1982년에 근무하였으며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초빙 교수로 재직하였다. 그는 미국 국방정보국(DIA, Defence Intelligence Agency)의 대 테러 담당 책임자였는데, 1988년 한국에서 올림픽이 개최될 때 한국올림픽 안전기구의 책임자로 한국에서 올림픽이 안전하게 치러지는데 많은 난제들이 있었지만 쇼 박사의 정확한 정보 분석과 일관된 신념으로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개최되는데 크게 기여했었다.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한국과 한국인을 돕는 일에 적극적인 후원자의 역할을 하다가 질병으로 1993년 사망하였다. 그는 한국에 관하여 ‘유교국가에서 법의 기준’과 ‘한국의 인권’이라는 저서를 내기도 했다.


  로빈슨 쇼의 미망인 캐럴 쇼(Carole Cameron Shaw)는 저명한 미국의 역사학자로서 많은 논문과 저서를 남겼는데, 특히 1999년에 워싱톤에 있는 한국대사관 기록보관소의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국내 학자들은 접근할 수 없는 중요한 자료들을 토대로 한국의 근대사 연구에 매우 소중한 저서 ‘The Foreign Destruction of Korea Independence’를 서울대 출판부에서 영문으로 출판하여 학계의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녀의 부모는 1959년에 한국에 선교사로 와서 1961-1962년에 대전대학(현 한남대학교) 수학과 교수로 초빙되어 대학 초창기에 학과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현재 88세의 나이임에도 건강하게 미국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데 지금도 학생들을 가르쳤던 한국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고 캐럴 쇼가 전해 주었다.


  쇼 대위의 둘째 아들 스티븐 쇼(Stephen R. Shaw)는 1949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1967년 서울외국인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국에서 자랐다. 그는 현재 Ohio 주 법원판사로 재직하고 있어 모친 주아니타 여사를 가까이에서 보살피고 있다. 그는 목원대학교회가 교회 홈페이지에 올린 윌리엄 해밀턴 쇼 일대기를 작성하는데 헌신적으로 협력하고 도움을 주었다. 가족에 대한 에피소드를 확인해 주고 보관하고 있던 자료들을 찾아 보내주고 미국에 있는 가족들의 근황을 알려주는 한편 이번 윌리엄 해밀턴 쇼 기념공원 조성사업에 가족을 대표해서 헌신적으로 협력해 주었다. 그러나 2010년 6월 17일 서울에서 열리는 쇼 대위 동상제막식에 참가하기 위하여 가족과 함께 시카고 공항에 나오는 도중 갑자기 심장충격을 받아 여행을 취소하고 치료를 받은 후 지금은 회복되어 건강을 되찾게 되었다. 그는 한국인들이 그 들 가족을 명

외롭게 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한국정부와 한국인 친구들에게 가족을 대표하여 감사한다는 서한을 뒤 늦게 보내왔다3).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어 그 가 한국을 다시 방문하고 평화공원에 세워진 부친의 동상을 참배 할 수 있기를 빈다.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은평공원에 건립되는 윌리엄 해밀턴 쇼 동상 제막식에 참가하기 위하여 한국정부의 초청을

받아 내한한 유가족들은 윌리엄 해밀턴 쇼 기념채플인 목원대학 교회를 방문하여 쇼 선교사의 제자들과 옛날 교인들과

 만날 수 있었다. 기념교회를 방문한 쇼 가족은 쇼 대위의 큰 며느리 Carole Cameron Shaw와 손자 William C. Shaw,

  자매 Roberta의 두 딸 Kathleen Banner와 Elizabeth Wright가 방문했다. 이와 함께 정부가 초청한 6.25 참전용사인

   Jesus Rodrique씨 부부도 동행했다.

 




 

 서울시 은평구에서는 6.265전쟁 60주년을 맞아 은평공원에 윌리엄 해밀턴 쇼 동상 제막식을 한국정부의

  초청으로 내한한 유가족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거행하였다. 현인택 통일부 장관을 비롯한 이성호,

   안병태 역대 해군 참모총장과 공정식 전 해병대 사령관등 육 해군,해병대 장병들과 이북도민 여러분과

   교계 학계, 정계 인사 등이 다수 참석하여 쇼 가족의 한국 사랑을 추모하고 호국보훈의 정신을 고취하는

   역사교육 현장으로 거듭나는 평화공원이 될 것을 다짐하였다.


이렇듯 쇼 가족들 모두는 쇼 대위 못지않게 한 결같이 한국을 사랑하고 잊지 않고 있다. 어떤 형태로든지 각자의 처지에서 도움이 되는 일을 찾아 봉사하고 한국을 돕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부전자전 부전손전으로 쇼 가족이 4대에 걸쳐서 한국을 사랑하고 있다. 지구상 어디에 있더라도 한국을 돕는 일을 생각하고 있을 그들이다. 양화진에는 이미 주아니타 여사의 묘역(Section F-5)이 남편 쇼 대위(F-6)옆에 예약되어 있다.


 

        둘째 아들 스티븐 쇼가 1995년 버지니아 대학을 졸업하고

        어머니 주아니타 여사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스티븐이

          지금까지 가까이서 어머니를 보살피고 있다.

 

그들은 한국의 산천과 바다를 사랑하였으며 한국인의 품성과 기질까지도 사랑하였다. 그들은 고향땅인 한국에 묻히기를 원하였고 우리 곁에 잠들어 있다. 윌리엄 해밀턴 쇼는 우리가 위험에 처할 때 지체 없이 우리 곁으로 달려와 목숨을 바쳐서 우리를 도왔으며 우리를 친구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친구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우리는 그 동안 우리의 절박한 입장만 생각하고 숨이 차게 달려오기만 했다. 우리 곁에 잠들어 있는 친구를 생각하지도 기억하지도 못 했다. 오직 그 가족들의 유일한 위안이며 추억인 목산언덕의 기념채플은 화재로 소실되어 없어져 버리고 대신 그 자리에 고층아파트가 들어서서 그 기념채플이 서있던 자리마저 찾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전사기념비가 세워졌던 전사지점도 그 당시에는 숲이었으나 지금은 빽빽한 주택가로 변하여 위대한 역사의 현장을 찾은 수도 없게 만들어 버렸다. 우리가 의리 있는 친구라고  말 할 수는 없다. 의식 있는 민족이라고 말 할 수는 더 더욱 없다. 헐버터 선교사는 이러한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어떻게 이야기 할지 알 수 없다. 그 때 이 골짜기에서 우리가 죽었어야 했는데, 그대가 대신 죽었다. 우리가 아픔을 겪고 고통을 당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대의 부모가 아픔을 겪었다. 지금까지 그대의 가족들이 고통을 않고 살아 왔다. 이제 우리가 그대의 가족에게 위로를 보내야 마땅하다.


  서울시 은평구에서는 2010년 6월 22일에 윌리엄 해밀턴 쇼의 한국 사랑을 전 세계에 알리고 국민들의 호국정신을 고양하기 위하여 평화공원을 열고 여기에 윌리엄 해밀턴 쇼 동상을 세우고 시민에게 공개하였다. 이제 녹번리 골짜기에 묻혀버릴 뻔하다 쇼 대위의 위대한 사랑의 파노라마가 백련산 계곡을 역사의 향기로 뒤덮게 하고 은평구를 평화를 지키는 도시로, 수도서울이 지구촌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평화의 도시로 거듭나는 출발점이 되게 하였다.

   백련산 끝자락 녹번리 계곡 냉정 골에서 한국인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달려온 친구가 어쩌면 코 흘릴 때 친구였을지도 모를 친구의 총탄에 맞아 쓰러지자 쓰러진 친구들을 구하기 위하여 친구들이 구조대를 결성하고 쏟아지는 총탄을 무릅쓰고 달려가 쓰러진 친구를 구하려다 또 친구가 쓰러졌다. 이 골짜기는 친구들이 친구를 위해 펼친 위대한 사랑의 파노라마가 대단원의 막을 내린 바로 그 역사 현장이었다. 반세기전에 이 골짜기에서 절박했던 형제들의 모습들을 그려 보면서 위대한 사랑이 이 시대에 우리와 함께 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 사랑이 우리 민족 전체의 심령 속으로 퍼져나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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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1. LT William Hamilton Shaw FILE, 257303/1105, Naval Personal.

 2."AND GOD SAID", written by William Earl Shaw(1895-1967), from Stephen R. Shaw, 2010.1.14.

 3. "I am Going to be One of Them", written by Richard T. Baker, from Stephen R. Shaw,2010.1.14.

 4. "FOR HIS FRIENDS", written by William Earl Shaw, from Stephen R. Shaw,2010.1.14.

 5. Shaw family photos and documents (1921-2003), from Stephen R. Shaw, 2010.2.17.

 6. Carole Cameron Shaw to author, Show family's documents, photos, E-mails:

 7. "William E. Shaw: From Pyongyang to Seoul (1890-1967)" written by Carole Cameron Shaw 2010.1.14.  

8. 신호철 편저, 양화진 선교사의 삶, 양화진 선교회, 2005.

9. 광성백년사, 광성백년사 편찬위원회, 1994.

10. 김진형, 북한 교회사 (1910-1950), 서울: 기독교 대한감리회 홍보출판국, 1999.

12. 한국감리교 인물사전, 감리교 역사위원회,2002.

13. 윤춘병, 한국감리교 외국인 선교사, 서울: 한국감리교회사학회, 2001.

14. 윤선자, 6.25 한국전쟁과 군종활동, 한국기독교 역사 제14호, 한국기독교 역사연구소(2001).

15. Allan R. Millett, Their War for Korea(1945-53), Brassey's Inc., Chap 35, 2002.

16. Carole Cameron Shaw, The Foreign Destruction of Korean Independence, Seoul University Press, 2007.

17. 성윤환, 차철수, 응암동 전사지 확인 탐방시 도움말을 준 응암장로교회 장로님들, 1950년 전쟁 시 마을에 거주함, 2010년 5월 11일.

19. 이동극, 이동극 자서전, 2010.

20. 야소교미감리회조선연회록(제14회), 평양 1921.

21. 야소교미감리회조선연회록(제15회), 서울 1922.

22. 윤희중 저, 한국인 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윌리엄 해밀턴 쇼, 이화,2010.

23. Minutes of The Korea Annual Conference of the Methodist Epicopal Church(21st), Seoul 1928.

24. Minutes of The Ninth Meeting of the Central Council of the Korean Methodist Church, Seoul, 1933.

25. Minutes of The Seventeenth Meeting of the Central Council of the Korean Methodist Church, Seoul, 1937.


1) William E.Shaw, Mongolia Bound!, The Korean Mission Field, pp. 73-77(1929). 큰 자부 Carole        

               Cameron Shaw 제공.


2) 조선감리회 회보 1949년 5월 15일자


3) 필자에게도 2010년 9월 23일 편지를 보내왔다.